▲ 동북쪽 능선아래 백곡토성안 전경

   
▲ 마을입구 남문 터 추정지

   
▲ 북문 터(추정지)에서 바라본 북쪽 마을 전경

   
▲ 북쪽 능선과 절벽

   
▲ 북쪽 능선에서 내려다본 백곡리

   
▲ 북쪽 자연 성벽

   

   
▲ 이서면사무소 마당 이서고국 표시석

 경북 청도는 영남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동쪽으로 경주와 울산, 울주 서쪽으로 경남 창녕과 밀양, 북으로 경산, 대구, 영천과 경계를 이룬다. 그리고 동쪽 운문산, 서쪽 비슬산, 남쪽 화악산 북쪽 용각산 등이 둘러싸고 있다. 이처럼 험준한 산세는 자연 방어망이다. 일찍이 독립국가 탄생 조건을 갖췄던 것이다. 본래 치소는 지금의 청도읍이 아니다. 고대 화양읍과 이서면 일대로 비정된다. 삼국시대 이전 ‘이서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서소국’ 또는 ‘이서고국’이라고도 불렸다. 이서국은 진한 소국 12개국 가운데 한 국가였다 막강한 국력은 삼국시대 이전 강대국 신라를 위협했다.

이서국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신라 3대 유리이사금 14년(37년) 이서국 군대가 금성(오늘날 경주)을 침공한다. 신라는 이서국 군대를 물리치지 못한다. 그러자 홀연히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군사들이 출현한다. 이들은 신라군을 도와 물리치고는 곧 사라진다. 이후 선왕인 미추왕릉에 수북하게 쌓인 댓잎 무더기가 목격된다. 사람들은 선왕의 혼령이 도왔다고 믿게된다. 두 사서는 3대 유리 또는 14대 유례 이사금 등으로 시기를 달리 기록했다. 무려 260년 시간차가 있다. ‘청도군읍지’는 ‘이서고성은 군 북쪽 10리에 있으며 4면이 토축으로 주위가 1천척이며 이서고지’라고 기록했다. 일제강점기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는 ’토평리‘를 ’이서국 읍치‘라고 전한다. 이서국은 철을 생산했는지 ’철전리‘라는 지명이 전해진다. 당시 사용했던 철기류와 민무늬 토기도 다량 출토된다. 그리고 둔직, 진터, 외목, 근방위, 은왕봉, 폐성 등 고대 지명이 남아 있다. 또 고분 340여기와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청도천을 따라 줄지어 분포하고 있다. 이서국의 화려한 문화 기반이 읽혀진다. 이에 삼한시대 상당한 세력을 가졌던 국가로 단정할 수 있다.
도성은 화양읍과 이서면 경계 백곡마을로 비정된다. 화양읍에서 대구 방향 국도를 따라 가다 청도천을 건너면 너른 평야와 함께 죽촌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 왼쪽 길을 따라가면 백곡마을이다.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성곽이 백곡토성이다. 읍치를 지키던 도성이었던 것이다. 성곽은 활처럼 주위 구릉을 둘러싸고 있다. 전체적으로 동, 서, 북쪽을 감싸 안고 남쪽은 트였다. 마을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가 나 있다. 북쪽 끝 지점에 구릉 절단면이 있다. 토성의 북쪽 성문 터로 짐작된다. 그러나 좌우 구릉 위 어느 곳도 토축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마을이 이서국의 도성이었는지는 제대로 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형태만 봐도 성곽 터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비석이 서 있다. 앞면에 ‘이서국성지'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옆면 각자는 ’신라 유례왕 7년(서기 297년) 금성을 공략하다가 반격을 받아 폐성 함락으로 멸망하였다’는 내용이다. 남동쪽 성벽은 이곳에서 동북쪽 해발 100∼ 200m 야산에 흔적이 발견된다. 대부분 채전이 개발돼 밭둑인지 구분이 불가능하다. 따라가 보면 인공 축성 흔적이 보이고 이런 흔적은 산 능선으로 이어진다. 북쪽은 자연 산세를 그대로 이용한 반면 저지대 남쪽은 성벽을 쌓았던 것이다. 토축은 길이 200m 높이 1∼3m 폭 2∼3m로 파악된다. 방향은 남동쪽을 방어하고 있다. 물론 거의 붕괴돼 뚜렷한 성벽 흔적은 살피기 어렵다. 남쪽으로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 남쪽에 청도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마을 서북쪽에서 가느다란 지류가 청도천과 만난다. 두 하천 모두 자연 해자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북쪽에 폐성이 있다. 백곡마을이 이서국 도성이었다면 불과 2km 이내 가까운 거리다. 그렇다면 도성을 지키던 전초 기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폐성은 주구산성이라고도 불린다. 이 산성은 청도천을 해자로 삼고 동남쪽을 방어한다. 이서국이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가 반격해오자 최후 항전을 벌였던 산성이다. 이서국은 전시에 배후 도성을 지키던 군사전략적 산성을 쌓았던 것이다. 이서국은 비록 패망한 국가로 역사서에 몇 줄 기록뿐이지만 신라와 자웅을 겨루던 강대한 국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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