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뒹구는 부산진성 옛성돌

   
▲ 남문 터안 정공단 공덕비군

   
▲ 무너진 옛성벽 흔적

   
▲ 부산진성 성돌로 신축한 증산왜성 성벽

   
▲ 부산진성 옛성벽

   
▲ 부산진성 터 벽면 경구

   
▲ 부산진성 터 신축 왜성 성벽

   
▲ 부산진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정발장군과 그의 애첩 그리고 비장들을 제향하는 부산 동구 좌천동 정공단

   
▲ 옛 성벽 터

   
▲ 정발 장군과 그의 애첩 그리고 비장들을 제향하는 정공단

  조선은 태종7년(1407년) 부산포를 개항한다. 세종3년(1421년) 경상도를 좌,우로 나눈다. 그리고 좌도 부산포에 군사령관격인 수군도안무처치사(정3품)를 파견한다. 이때 병선 33척과 군사 1,799명을 배치한다. 산하에 부산진첨사영을 비롯 좌, 우도 해안에 11개 만호영을 둔다. 부산진첨사영에는 병선 9척과 군사 2,200여명을 배치한다. 세조12년(1466년) 전국 진관체제를 구축한다. ‘읍’단위 행정조직을 군부대격인 ‘진’으로 편성, 수령이 군사지휘관을 갖는 체제다.

부산진은 성종21년(1490년) 성곽을 축조한다. 규모는 둘레 2,026척, 높이 13척이었다. 중종5년(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난다. 부산진은 왜관과 왜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다. 그리고 성곽과 보루를 증축한다. 중종20년(1525년) 성곽 북쪽에 관문을 두고 출입자를 감시한다. 일본 침략 징후가 포착된 선조24년(1591년) 부산진성을 수축하고 참호를 설치한다. 사전에 철저히 대비했던 것이다.

선조25년(1592년) 임진년 4월13일 부산포에 일본군 선단이 들이닥친다.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선봉대 제1군이었다. 700여척 병선에 분승한 1만 8,700명 대군은 가장 먼저 경상좌수영 산하 부산진을 공격 목표로 삼는다. 이날 절영도(오늘날 영도)에서 사냥 겸 군사훈련을 하던 첨사 정발은 선단을 목격하자 백성들을 성 안으로 긴급 대피시킨다. 그리고 600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결사항전 의지를 다진다.

일본군은 새벽 5시께 부산진성을 공격한다. 전투는 약 2시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다. 조선군은 해자에 마름쇠(적 공격을 지연, 저지시키기 위해 설치하는 방어용 무기)를 뿌려놓고 적을 맞는다. 공격이 시작되자 정발은 병력 열세에도 앞장서서 분전한다. 일본군도 기세가 꺾여 잠시 공격을 멈춘다. 그리고 오전 10시께 재공격한다. 정발은 독전 끝에 총탄을 맞고 절명한다. 전투는 낮 12시께 끝나고 부산진성은 함락된다. 조선 군, 관, 민의 저항이 얼마나 완강했던지 일본군은 보복으로 개와 고양이까지 죽인다. 참혹했던 전투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일본군은 함락된 부산진성을 뜯어내 가까운 ‘증산’에 왜성을 쌓는다. 병력과 물자보급 본국과 연락을 위한 병참기지를 축조한 것이다. 왜장 ‘모리 데루모토’가 1만 여명을 동원해 쌓았다고 한다. 왜성은 천수각을 중심으로 아래 계단식으로 조성된다. 산 이름을 딴 ‘증산왜성’은 지금 증산체육공원이 돼 있다. 터 주위 ‘본환’은 지금도 형태가 뚜렷하다. 터는 해발 130m 정상부 평탄지다. 남북 약 520m 동서 190m에 이른다. 아래 동서방향으로 2, 3단을 이루며 남북 능선 따라 좁고 긴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일본군은 증산왜성 방어와 해안 연결을 위해 남동쪽 1km지점 야산에 또 작은 왜성을 쌓는다. 그간 자성대로 불리던 왜성이다. 자성대는 최근 주민들의 뜻에 따라 부산진성공원으로 거듭난다. 임진, 정유왜란 후 선조 40년 함락된 부산진이 이곳으로 옮겨와 한말까지 방어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조선 전기와 후기 부산진성이 명칭은 같지만 위치와 형태가 달라진 이유다.

옛 기록은 초기 부산진성은 ‘동래현 남쪽 21리 있으며 산세가 솥을 닮았고 부산포 서북쪽’이라고 돼 있다. 오늘날로 치면 부산시 동구 좌천동 증산 일대다. 그러나 옛 성곽은 근대 도시개발과 확장으로 윤곽조차 비정하기 어렵다. 다만 옛 그림으로 유추해볼 수밖에 없다. 그중 임란당시 전투장면을 그린 ‘부산진순절도’는 당시 성곽 규모를 잘 보여준다. 이에 따른 위치는 증산아래 현 좌천1동 정공단과 좌천아파트 사이 부근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남문 부근과 바다가 맞닿아 있었다. 또 남문은 현 일신기독병원 근처 정공단 터이고 성곽 서북쪽 장대는 증산체육공원과 동구도서관 일대임을 알 수 있다. 성안부지와 남동쪽 바다는 매립됐다. 여기에 학교와 주택 등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이곳 부산진성은 조선 초기 수군의 배치와 진성 규모, 형태를 잘 보여준다. 또 조선 전기 대일본 방어에서 부산포의 군사 전략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 접전에서 일본군과 조선 군이 혈전을 치른 항전 현장이다. 아직도 옛 터 지하에 기단부나 해자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증산왜성을 포함한 이 일대 발굴 조사와 함께 성곽 일부라도 복원 정비가 이뤄져야할 것이다. 군, 관, 민 혈전을 치른 동래읍성과 함께 충절 어린 역사 깊은 유적이기 때문이다. 복원정비가 된다면 후세 교육장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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