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성안 발굴 석재유물

   
▲ 복원 수세식 화장실 유적

   
▲ 복원화장실유적

   
▲ 서쪽 성벽과 내부 회곽도

   
▲ 서쪽에서 바라본 후원과 성안 전경

   
▲ 성안 대형 건물 터

   
▲ 성안 동서간 수로 석축

   
▲ 후원 인공저수조

   
▲ 수세식 화장실 유적

   
▲ 공방 터

   
▲ 왕궁리 오층석탑

   
▲ 오층석탑과 성안 전경

   
▲ 왕궁리 오층석탑

  백제 고도는 흔히 충남 공주와 부여를 손꼽는다. 지금도 당대 문화재가 남아 있다. 그런데 백제의 자취가 두 도시 못지않게 서린 도시가 또 있다. 백제30대 무왕이 천도를 단행하려 했다는 전북 익산이다. 무왕은 익산(옛 지명 금마저) 출신이다. 600년에서 641년까지 41년간 재위한다.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며 제31대 의자왕의 부왕이다. ‘삼국유사’ 서동 설화의 주인공이다. 재위 초부터 신라를 공격하는 서진정책에 주력했다. 이에 수많은 신라의 성을 함락시킨다.

익산에는 무왕에 얽힌 설화와 함께 백제 유적이 숱하다. 대표적으로 왕궁리성과 미륵사 터, 미륵 산성, 쌍릉(대릉과 소릉) 등을 손꼽는다. 이 가운데 왕궁리성은 익산 천도설의 핵심이다. 이곳은 고대부터 왕궁 터로 알려져 왔다. 조선시대 기록에도 이같이 전해진다. 이에 고조선 기준왕의 궁성, 마한 또는 백제시대 궁성, 후백제 견훤의 궁성 등 학설이 난무했다. 그런데 최근 수차례 발굴이 이뤄진다. 점차 면모가 드러나 지금은 백제시대 도성으로 굳어진 분위기다.

왕궁리성은 발굴 결과 건물 터와 정원, 공방, 화장실 등 다양한 생활시설이 확인됐다. 건물은 모두 남쪽에서 최대한 북쪽으로 치우친 위치에 지었다. 건물 터는 모두 13 동이 확인됐다. 터에서 ‘수부’란 글귀가 새겨진 기와가 발굴됐다. 이는 ‘왕족이 거주하는 공간 또는 건물’을 뜻한다. 지금껏 부여와 공주에서만 출토된 기와다. 이 터에 왕족이 거주한 것이 분명하다. 나아가 익산이 그에 버금가는 도시임이 읽혀진다.

건물터 뒤로 지대가 높은 야산이 있다. 이곳은 숲과 연못 터가 확인됐다.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물길을 내고 물을 흐르게 했다. 물길 따라 석축을 쌓아 물이 빠지지 않도록 했다. 동쪽 사각정자 터 앞에는 인공호를 팠다. 바로 옆에 각종 괴석을 모아 인공 산을 만들었다. 여기서는 한반도에서 볼 수 없는 괴석도 발굴됐다. 중국과 교류가 활발했던 것이다. 건물 터 앞에는 너른 공간을 확보했다. 아마 만조백관이 왕위 등극 등 의식과 의례, 회의를 했을 것이다. 북서쪽에는 고대 수세식 화장실 유적이 발굴됐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낸 폭 1.5m 가량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게 하고 그 물로 화장실 뒤처리를 하게 했던 것이다.

궁성은 남북이 긴 직사각형 성곽이 둘러싸고 있다. 규모는 동서 245m, 남북 290m에 이른다. 한 변 길이가 250m되는 정사각형 두 개를 합친 구조다. 건물 터마다 주초석 배열이 일정하다. 건물 터와축대는 모두 나란히 질서정연하게 배치했다. 얼핏보면 지나치게 비례미가 돋보이는 듯하다. 건물 터는 지대를 평지보다 높이고 계단을 만들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진다. 중국 북위대 의 낙양성, 한대의 장안성과 비슷하다. 중국에서 유행하던 당대 도성의 모양과 흡사하다. 당대 활발하게 교류하던 중국 도성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성벽은 장방형 성 돌을 바깥 면을 맞춰 쌓았다. 내부는 흙과 잡석을 채워 견고함을 더했다. 무너진 지점에서 기와조각이 발견됐다. 지붕을 덮어 빗물의 침투를 막은 것이다. 서쪽 성벽 밖으로는 일직선 긴 해자를 팠다. 안쪽 회곽도는 바닥에 판석을 깔았다. 남쪽 성벽은 동서로 일직선이다. 문터가 3곳 확인됐다. 가운데 문은 현재 5층 석탑과 일직선상이다. 탑이 선 자리가 궁성 중앙부인 것이다. 이는 궁궐이 자리했다가 사찰이 차지해버린 흔적이기도 하다. 백제는 의자왕대 멸망당한다. 도성이 사라지고 사찰이 들어선 때와 맞물린다. 성 터에 석양을 받으며 5층 석탑이 서 있다. 마치 백제 패망의 아픔을 간직한 듯 몸돌이 붉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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