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쪽 성벽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 산성 정상부 장대 터

   
▲ 산성 정상부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 서남쪽 성벽을 밖에서 본 전경

   
▲ 장대 터 각대지점

   
▲ 봉대정

   
▲ 남쪽 성벽 원경

   
▲ 정상부 송신탑

   
▲ 정상부 건물 터 축대

   
▲ 산성안 평탄지

  전남 무안군은 서해안 반도 지형이다. 이 반도 서북쪽에 다시 두 개 반도가 붙어 있다. 해제반도와 망운반도다. 지명은 해제면과 망운면으로 분리돼 있다. 해제면은 무안군청에서 서북쪽 24번 국도를 달리다 무안공항을 지나면 처음 만난다. 길목이 좁아 얼핏 보면 마치 섬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연히 육지와 연결돼 있다. 해제반도는 바로 옆 신안군 지도, 임자도, 증도 등을 잇는 길목이다. 북동쪽은 과거 뱃길로 나다니던 영광군이었다. 이곳은 2018년 준공한 칠산대교가 잇는다. 백제가 웅진에 도읍을 두었던 6세기 무렵 해제반도 치소는 도제현이었다. 그러나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경덕왕16년(757년) 해제현으로 고친다. 그리고 가까운 무안군 영현으로 둔다. 고려 현종 9년(1018년) 영광군, 조선 태조1년(1392년) 함평군이 된다. 섬은 아니었지만 해로를 통해 왕래 편의를 위한 행정구역 조정이었다. 해제 일대는 고대부터 무역선이 오고가는 항로가 있었다. 어업이 발달해 성시를 이루는 항, 포구도 많았다. 지리적으로는 인근 신안, 무안, 함평, 영광 등의 중심지다. 이 때문에 고대부터 독립된 행정구역이 존재했다.

해제반도 고대 치소는 전남 무안군 해제면 고읍리로 비정된다. 이 마을뒤에 봉대산이 있다. 큰 봉우리와 작은 봉우리가 가까이 낙타등처럼 이어진 형태다. 두 봉우리에서 사방으로 신안, 무안, 영광, 함평 등 해안과 내륙 동시 조망이 가능하다. 특히 서해안 일대는 육안으로도 보인다. 천혜의 군사요충지로 해로 감제가 충분히 가능하다. 이 해발 190m 작은 봉우리에서 최근 고대치소 또는 군사적 방어, 백성 대피용으로 추정되는 산성이 발견됐다. 유구는 2005년 해제면 푸른 숲 가꾸기 사업 도중 산을 가로 지르는 임도 개설 과정에서 드러났다. 이듬해 시굴조사 2016년 긴급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체성 형태는 북쪽을 꼭지점으로 동서쪽 아랫변을 잇는 삼각형이었다. 그리고 남, 북쪽 성벽, 북, 동쪽 성벽, 꼭지점 두 곳에서 치성이 드러났다. 성벽은 구조와 안정성, 성돌 가공, 축조 방식 또한 뛰어난 것으로 파악됐다. 성벽은 하단부에 넓고 큰 지대석을 앉히고 그 위에 성벽을 쌓았다. 성 돌은 하나같이 규격화된 장방형이다. 사람의 손과 정으로 일일이 다듬었던 것이다. 이런 축성방식은 서해안 고대 산성 치고는 이색적이다. 정상은 동쪽 건물 터 축대 부근이외 거의 움푹 꺼진 평탄지다. 성벽이 정상 주위를 감싼 테뫼식 산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목포대박물관 발굴팀에 따르면 면적 6,587㎡ 성벽 둘레 430m, 폭 550∼585m 높이는 바깥벽 1.23∼2.06m 안벽 4.29m로 확인됐다. 치성은 성벽에 붙은 사다리꼴로 260∼280m☓640∼840m로 파악됐다. 성문은 통일신라 또는 고려시대 양식으로 확인됐다. 통일신라시대 성문 전통양식은 사다리를 이용해 오르내리는 현문식이다. 또 함께 발견된 기와와 토기 조각은 백제 또는 통일신라시대 성벽임을 추정케 했다. 봉대산성은 현재 시굴조사만 마친 상태다. 제대로 된 발굴이 이뤄진다면 더 많은 역사적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봉대산은 인근 고읍리, 광산리, 양간리 등에서 오르는 산길이 나 있다. 평소에도 인근 주민들이 자주 찾는다. 그리 높지 않고 임도가 여러 방향으로 개설된 덕분이다. 이 산 큰 봉우리 정상부에 근대 콘크리트 누각 봉대정이 서 있다. 이 고장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에 건너가 사업을 했다는 홍종의 옹이 희사한 누각이다. 2002년 홍 옹의 공적을 기리며 주민들이 세운 비석이 오르는 계단 옆에 있다. 그 앞으로 너른 평탄지가 있다. 옆 공터에는 운동기구가 갖춰져 있다. 주민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누각에 올라서면 서북쪽으로 칠산바다, 동남쪽으로 해제면소재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봉대산성은 누각에서 서남쪽 임도를 따라간다. 잠시 후 길옆에 토축이 보인다. 토축을 따라가면 잠시 후 구릉위로 통신첨탑이 보인다. 그 아래 가파른 산길이 나 있다. 올라가면 바로 산성 안이다. 첨탑 위치가 체성 동쪽 끝 지점이었던 것이다. 이 지점은 사방이 확 트여 있다. 칠산바다와 서해안 일대가 환하게 조망된다. 산성 장대 터였을 것이다. 바로 옆에 직사각형 축대가 있다. 높이가 사람 키 정도다. 성 안 옛 건물 터로 추정된다. 체성은 첨탑에서 서북쪽으로 낮게 이어진다. 성벽은 야산을 수직으로 삭토하고 토석으로 다진 내탁식이다.

오른쪽은 내리꽂히듯 가파른 절벽이다. 북쪽 해안 방향 방어가 완벽하다. 왼쪽은 움푹 꺼졌지만 너른 지형이다. 잡초와 수목이 자라지만 성 안에 해당한다. 서북쪽 끝 지점 체성은 곡선으로 처리했다. 잡초가 우거져 접근이 불가능했다. 체성은 여기서 다시 남동쪽으로 급하게 꺾인다. 남쪽 끝 지점에 누군가 쌓은 돌탑이 여러 기 서 있다. 계단식 축대가 있다. 사찰 터 또는 무덤이 아닌가 싶다. 그 옆에는 무너졌지만 옛 모습을 간직한 원형 치성이 자리하고 있다. 축성방식이 위로 갈수록 안으로 들여가며 쌓았다. 그리고 성돌마다 바깥 면이 조금씩 불룩하게 나와 있다. 고구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축성방식이다.

이어 남쪽에 일직선으로 수평을 맞춰 줄눈 쌓기로 축성한 성벽이 보인다. 흙속에 묻혀 있다가 임도 개설공사로 드러났다는 지점이다. 볼수록 감탄을 자아내는 성벽이다. 오늘날 벽돌로 담장을 쌓듯 쌓았다. 성 돌 또한 하나하나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다듬었다. 여기도 치성과 마찬가지 ‘육합쌓기’와 함께 위로 갈수록 ‘들여쌓기’를 했다. 이곳은 고구려와 거리가 멀다. 그런데 고구려 축성방식이 엿보인다. 신라가 고구려 정복 후 배운 축성방식이 아닐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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