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진 문학(사학)박사

   
▲ 우록동 녹동서원의 전경

 김충선(1571~1642)은 일본국 출신의 항왜장으로서 일본 이름은 사야가(沙也可)였다. 김충선의 증조부는 사옥(沙鋈), 할아버지는 사옥국(沙沃國), 아버지는 사익(沙益)으로 전해지며, 그는 이미 일본에서 결혼한 몸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조선에 강제 출정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처자와 가족들은 풍신수길에 의해 일본에 인질로 잡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에서의 부인은 진주 목사를 지낸 장춘점의 딸 인동장씨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정한 어느 일본 장수는 조선의 백성들이 등에 아버지를 업고 처자를 거느리며 산골로 피난 가는 모습을 보고 조선에는 효와 충이 살아있는 나라임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100여 년간 내란에 시달린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을 것이다. 사야가 또한 이런 광경을 경험한 일본 장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제2대장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으로서 그 휘하에 약 3,000명을 거느린 장수였다. 그는 조선에 출병하여 전투를 치르지 않고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병사 박진에게 귀순의 뜻을 밝히는 ‘講和書’를 보내어 휘하의 병사들을 데리고 조선에 귀화하였다.

정복자의 일원으로 조선에 출병한 그가 ‘강화서’를 보내 귀화한 사례는 극히 드문 일에 해당한다. 그와 함께 귀화한 부하 장수들로는 김성인(沙汝謀), 김계수, 김계충 등이 있는데 이들은 조선의 의병 및 관군과 함께 경상도 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최신식 무기였던 조총과 화포, 화약의 제조법을 전수하여 조선 정부가 신병기의 국산화를 이루어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일본군의 각종 전술을 조선군에 전파함으로써 임진왜란 초기 풍전등화 같았던 조선의 난국을 타개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었다. 조선 국왕 선조는 그의 공로를 높이 사 사성 김해김씨를 하사하고 이름 또한 충선으로 지어주었다. 여기서는 김충선의 이러한 노력이 조선의 임진왜란 극복에 어떻게 기여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야가(김충선)는 임진왜란 중에 조선에 귀화한 왜인 즉 항왜의 한 사람이다. 항왜란 조선에 투항 또는 귀순한 일본 사람을 이르는 명칭이다. 임진왜란 중에 투항한 일본인은 대부분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이 평양성 전투 이후 보급선의 단절에 따른 기아와 질병, 수자리 임무에 시달리거나 남하한 일본군이 조선의 동남 해안에 성을 쌓으면서 성 쌓기에 시달린 일본군인이 고된 노역을 피하기 위해 대량으로 생겨났다. 투항의 시기 또한 그들이 전쟁에 이긴다는 보장이 없어진 1593년 이후로 대부분 나타난다. 특히 조명연합군에 쫓겨 내려온 일본군이 굶주림과 축성작업의 고된 노역을 피하기 위해 많은 투항자가 나왔다. 이들의 투항 배경에는 조선 조정의 투항 유인책도 상당 작용하였다. 국왕 선조 또한 항왜의 필요성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항왜를 유치하도록 조치하고 항왜를 유인해온 사람에게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항왜장 사야가의 투항 배경은 위와 같은 일반적인 항왜들의 투항 원인과는 차별화된다. 우선 사야가는 조선국 절도사에게 귀화의사를 밝힌 ‘강화서(講和書)’를 보낸 사실이 있고, 또 귀화 시기가 일본군의 후퇴 시기가 아닌 임진왜란 직후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모하당 문집』에 실린 ‘사가선소(辭嘉善疏)’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점령군으로 들어온 적군의 장수가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조선에 자진 투항한 것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그 자신은 ‘조선의 문물에 대한 흠모와 조선에 정착하여 문화인으로 살겠다’는 것이 투항의 배경이라 하였다.

사야가가 개전 초기 조선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흔적이 없고 ‘강화서’에서 밝혔듯이 ‘힘이 없어서도 아니고 다만 이 전쟁이 명분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자진 귀순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명분 없는 전쟁’이 의미하는 바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일본국내의 통일전쟁 과정에서 사야가의 가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멸문이 되고 강제로 조선에 출병하였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여하튼 사야가는 일반적인 일본군의 투항과는 달리 정복군으로 조선에 출정하여 조선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자진하여 귀순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에 귀순한 사야가는 경상도 지역의 조선군을 도와 일본군에 대항하는 전투를 이어나갔다. 그가 조선 조정으로부터 성명을 하사 받고 가선대부의 직책을 받은 것이 임진왜란 다음 해인 1593년인 점을 감안할 때, 그 이전에 이미 항왜장으로서 조선군의 전투를 지원하여 일본군을 물리치는 공적을 쌓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야가는 울산 출신의 의병 김태허, 서인충, 서몽호와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여 울산지역을 사수하였고, 임진년 9월에는 순찰사 김수(金睟)와 좌병사 박진(朴晉)에 의하여 울산가군수로 지명 받은 전 만호 금태허가 주도하는 군사를 도와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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