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붕괴를 면한 동남쪽 성벽

   
▲ 밭둑처럼 보이는 남쪽 성벽

   
▲ 서남쪽 문 터 하단부 성돌

   
▲ 성곽에서 바라본 죽성리 마을

   
▲ 소름요 옆 왜성 지성 각대 석축

   
▲ 원형이 보존된 남쪽 성벽

   
▲ 죽성리왜성 지성과 이어진 석축

   
▲ 진성의 남동쪽 성벽

   
▲ 채전으로 변한 진성안

   
▲ 축성 당시 높이로 남아 있는 성벽

  조선 초 경북 동해안 방어는 동래현 부산포 경상좌수영이 관할했다. 좌수영 아래 부산진 첨사영과 12개 수군만호영을 두고 외적을 방어했다. 당시 수군만호영이 주둔한 포구는 동래 다대포, 해운포, 서평포, 기장 두모포, 울산 개운포, 서생포, 염포, 장기 포이포 월성 감포, 흥해 칠포, 영덕 오포와 축산포 등이다. 경상좌수영은 1592년 임진왜란 직전 경상좌도 수군진을 주 방어선인 동래 부산진 인근으로 재배치한다. 그러나 왜군은 부산진과 다대포 등 예하 수군진과 동래읍성을 순식간에 함락시킨다. 경상좌수영도 점령돼 7년 간 제대로 기능을 못하게 된다.

전란이 끝난 인조 13년(1636년) 경상좌수영을 감만이포(부산 감만1동)로 옮긴다. 그리고 인조 7년(1629년) 경주, 장기, 흥해 등 동해안 수군진을 부산으로 옮긴다. 이때 두모포영과 장기 포이포영을 현 동구 수정동과 현 부산 수영구 민락동으로 각각 옮긴다. 그리고 감포영, 축산포영, 칠포영 등을 혁파시킨다. 이들 수군진이 전란의 위기에 제대로 방어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다.

두모포는 경상좌수영 북쪽으로 매우 가깝다. 임란초기 동래읍성을 함락한 왜군은 이튿날 파죽지세로 동해안으로 북상한다. 기장을 거쳐 울산과 경주로 침략이 이어진다. 왜구를 맞은 기장읍성과 두모포진성이 이때 잇따라 함락된다. 두모포진성은 삼포왜란 발발직후인 중종5년(1510년) 왜구 방어를 위해 쌓은 해안 성이다. 위치는 바다와 하천이 만나는 구릉과 평지다. 해안에 상륙해 기장현 등 내륙으로 진입하려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다. 또 포구를 안고 있다. 이는 군선 정박과 수군 물자 보급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함락과 함께 폐허로 방치된다. 이후 정유재란 때 후퇴하던 왜군이 죽성리에 주둔한다. 왜군은 기장읍성과 두모포진성 성 돌을 뜯어내 왜성을 쌓는다. 전란을 끝나고 두모포진은 부산으로 옮겨가고 이름만 한동안 두모포진으로 불린다. 이에 두모포는 두호로 바꾸게 된다.


초축 시기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성곽 축조 이전 보루성으로 토성 내지 목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 해안 방어망으로 추정된다. 진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경상도속찬지리지(1469)’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등에 전한다. 경상도속찬지리지는 ‘두모포는 기장현 동쪽 5리에 있고 유군 병선 8척과 군병 700명, 무군 병선 5척”이라고 기록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두모포영 현 동쪽 7리 수군만호 1인 중종 5년(1510) 초축 둘레 1,250척(400m), 높이 10척(3m)”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은 고려시대 왜구 방어용 토성을 중종 대 개축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조선은 개국초 태조6년(1397) 각 도에 2~4개 진을 두고 첨절제사를 두었다. 이로 미뤄 두모포진도 그 당시 설치됐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직전 에는 종4품 수군만호아래 병선 16척과 군사 845명을 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진성 터는 부산 기장군 죽성리 749번지 일대에 지금도 남아 있다. 본래 형태는 왜군이 남쪽 죽성리에 왜성을 쌓느라 붕괴됐다. 다행히 남쪽에 길이 100m 높이 1.5m 잔해가 있다. 북쪽으로는 청강천이 곡선을 그리며 동해로 흘러든다. 동쪽 바다와 함께 자연해자를 이룬다. 체성은 청강천 남쪽 평지와 구릉을 아우르는 평산성 형태다. 체성은 구릉과 평지를 따라 들쭉날쭉하는 형태다. 둘레는 약350m이고 성문 터는 서북과 동북에 냈다. 성벽은 대형 판석을 지대석으로 앉혔다. 위로 올라가며 다듬지 않은 성 돌을 빈틈없이 끼워 쌓아 올렸다. 안팎이 비슷하지만 안쪽 성벽은 사람 허리높이 정도다. 폭 3∼4m로 안쪽에 토석을 채웠다. 성벽 절반이 내탁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답사는 남쪽 죽성리 공동묘지에서 출발한다. 다육이농장 비닐하우스를 지나면 오른쪽 구릉위에 죽성리왜성이 보인다. 농장옆길은 자기를 굽는 ‘소름요’ 입구로 이어진다. 건너편에 잡초로 뒤덮인 길이 보인다. 정유재란 당시 도공들이 끌려간 길이라고 한다. 소름요 안에 당시 끌려간 도공의 한을 달래는 추모비가 서 있다.
반대쪽 서쪽 구릉은 왜성 지성이 차지하고 있다. 본성이 아닌 이 성곽은 숲속에 잔해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성돌 모두 조선 진성에서 빼내간 돌이라고 한다. 농장 끝지점에서 너른 채전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성벽이 길게 이어진다. 붕괴되지 않고 하단부와 중간층이 남은 남쪽 성벽이다. 체성 가운데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길이 30m 높이 2.5m 가량이다. 성벽은 안쪽이 높고 바깥이 낮다. 그 끝에 무덤이 서너기 있다. 좀 더 나아가자 가파른 능선이 나타난다. 능선은 죽성리 해안으로 길게 이어진다. 바로 앞으로 채전과 대나무숲, 그리고 조금 멀리 청강천이 흐른다. 성벽 안쪽 평탄지에는 채전이 개간돼 있다. 건물 터가 분명하지만 흔적이 없다.

서남쪽 체성은 대나무숲이다. 들어서기 직전 또 다른 성벽 흔적을 만난다. 비록 무너졌지만 아직 남아 서 있는 성돌마다 굵기가 예사롭지 않다. 내려가는 길이 나 있다. 남문 터가 아닌가 싶지만 확인이 어렵다. 다시 올라와 대나무숲을 헤치고 올라가니 바로 비탈진 언덕이 나타난다. 내탁식 성벽 안쪽 경사지다. 만만한 가파르기가 아니어서 몇 번씩 미끄러진다. 둑 위에 올라서니 소나무숲 사이로 죽성리왜성 지성이 보인다. 진성이 죽성리왜성을 보호하는 지성에 병합돼 버린 지점이다. 지성의 각대 지점은 계곡을 품고 있다. 진성과 왜성이 만나면서 진성 형태가 사라진 현장이다. 오른쪽 계곡으로 내려가지 죽성로 도로가 나온다. 건너편 논에도 체성이 이어진다. 청강천과 구릉사이는 너른 논이다. 논과 해산물 건조장 바닥 사이에 줄지어 길게 늘어선 암석들이 보인다. 11.21(월)∼24(목) 상단부가 사라진 성벽 하단부 지대석들이다. 죽성로가 지나는 구릉지 도로변에도 인공축조 성돌이 드러나 있다. 모두 진성의 성벽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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