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문 진동문

   
▲ 동문 건춘문

   
▲ 동쪽 회곽로

   
▲ 복원 장대 진남대와 명나라 천만리장군 공덕비

   
▲ 본환 입구 동쪽 성벽

   
▲ 서문 오른쪽 우주석(서문쇄약)

   
▲ 서문 왼쪽 우주석(남요인후)

   
▲ 부산진성 정상부 왜성(자성대) 흔적

   
▲ 서문(금루관)

   
▲ 서쪽 왜성 본환 아래 성벽

  선조 25년(1592년) 5월 23일 일본군 1만 8700명이 군선 700척을 이끌고 부산 절영도(현 영도)에 상륙한다. 이튿날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제1군은 다대포진과 부산진을 동시에 공격한다. 다대포진 첨사 윤흥신은 이틀간 전력을 다해 싸운다. 1차 공격은 막아냈으나 이튿날 재공격은 중과부적으로 패한다. 윤흥진은 객사 동쪽 연못에 동생과 함께 순절한다. 부산진은 첨사 정발이 군사들과 결전을 다짐한다. 일본군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한다. 결국 오전 5시~7시, 오전 10~12시 두 차례 공격으로 함락된다. 정발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전사한다. 중과부족으로 혈전을 벌이던 군사들도 거의 모두 전사한다.

일본군은 부산진성 서북쪽 증산 정상부에 성곽을 쌓는다. 왜장 모리 데루모토가 쌓았다는 증산왜성이다. 지금은 부산시 동구 좌천동 증산공원이 돼 있다. 천수각 터 주위 본환은 지금도 형태가 뚜렷하다. 그리고 여기서 남동쪽 1km 떨어진 범일동 해발 36m 산위에 또 작은 왜성을 쌓고 ‘자성대’라 명명한다. 자성대는 지금 남쪽이 매립돼 해안과 멀다. 그러나 당시는 맞닿아 있었다. 모성 방어와 함께 해상보급로 확보가 그 목적이었던 것이다.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잠시 머물러 ‘고니시성’이라고도 불린다.

자성대는 일제강점 초기 ‘자성대공원’으로 지정 고시된 뒤 2022년까지 79년간 그대로 불린다. 그러다가 2021년 뜻있는 부산시민들이 일제 잔재라며 개명을 요구하고 나선다. 1년여 노력 끝에 지난해2월 ‘부산진성공원’으로 제 이름을 찾는다. 선조 40년(1607년) 함락된 부산진(좌천동)을 이곳으로 옮긴다. 이에 한말까지 ‘부산진첨사영성’ 즉 ‘부산진성’이었던 이름을 다시 찾은 것이다.

조선 후기 좌천동에서 옮긴 부산진은 자성대 왜성을 그냥 사용하지 않고 성문과 성벽을 신축, 확장한다. 그리고 동문(진동루), 서문(금루관), 남문(진남루), 북문(구장루) 등 문루를 새로 세운다. 이후 첨사 임희봉은 1842년 ‘육우정’을 짓고 ‘승가’라는 이름을 붙인다. 자성대가 그 자체 부산진성이고 승가정이 장대가 된 것이다. 비록 왜성이었지만 조선의 방어용 군사시설로 명확하게 자리매김하고 의미를 다잡은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성곽은 영욕과 쇠락의 길을 걷는다. 마침내 구한말 폐성의 길로 접어든다. 부산시가 정비 복원에 나선 것은 1974∼1975년경이었다. 이때 동문(건춘문)과 서문(금루관)을 복원한다. 정상부 평탄지 승가정 또는 육우정 터로 추정되는 위치에 정면 5칸, 옆면 4칸, 2층 팔작지붕 건물도 다시 짓는다. 남문 터가 도시개발로 사라져 편액 ‘진남루’를 이 건물에 붙인다. 또 남동쪽 외곽 지표 아래 조선 후기 성벽을 발굴한다. 도시건설로 사라진 성벽이었다. 서문은 일제강점기 촬영된 사진으로 복원했다. 양쪽 성벽은 왜성처럼 경사진 모습이나 문루와 여장은 조선식 구조임이 확인됐다. 홍예 좌우 돌기둥(우주석)도 찾아내 다시 세운다. 돌기둥에는 남요인후(南徼咽喉 남쪽의 목구멍), 서문쇄약(西門鎖鑰 서쪽의 자물쇠) 등 새겨져 있다. 부산이 국방의 요지이며 그 중요성을 강조한 유물인 것이다.

조선 후기 부산진성은 본래 둘레 약 2.4km에 이르는 큰 성이었다. 터 주위로 최고 10m, 최저 1.5m 성벽이 둘러싼 형태다. 정상부는 사방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둘레길(회곽도)도 걸어볼만 하다. 물론 급경사 축성이 특징인 왜성이 그대로 남은 구간이 많다. 성벽은 높고 길게 이어진다. 방향이 바뀔 때마다 각대가 칼날 같다. 정상부 진입 계단은 남, 북으로 나 있다. 북쪽 계단아래 작은 문루는 북문 터로 짐작된다. 되돌아 계단을 타고 정상으로 오른다. 올라서면 너른 공터가 보인다. 진남대가 우뚝 눈에 들어온다. 탁 트인 남쪽 바다가 조망된다. 명나라 장수 천만리를 기리는 ‘천만리영양천공비’가 그 옆에 서 있다.

동남쪽 계단은 동문과 만난다. 뒤에 최영 장군 비각이 있다. 입구에 최영 장군 부친이 남긴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팻말이 보인다. 최영은 고려시대 왜구 토벌에 공이 커 남해안 백성들이 기리는 인물이다. 동문밖에 조선통신사역사관이 보인다. 그 옆 건물이 영가루다. 초기에는 앞바다와 해자 준설토를 쌓은 흙더미위에 세운 누각이었다. 지금은 근래 복원한 건물이 서 있다. 영가루는 조선후기 조선통신사 환송식이 열리던 누각으로 전해진다. 부산진성은 서생포왜성과 함께 전란 후 왜성을 조선군이 사용한 사례로 손꼽힌다. 이 때문에 ‘자성대’란 일본식 이름을 지우고 우리의성 부산진성을 다시 찾아낸 부산시민이 자랑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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