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문 터에서 바라본 읍성안 전경

   
▲ 남쪽 성벽

   
▲ 동문 터

   
▲ 동문 터안 우물 터

   
▲ 동문 터앞 공덕비

   
▲ 동쪽 옛 성벽 전경

   
▲ 동쪽 옛성벽

   
▲ 복원한 해자 터

   
▲ 북문 터 옆 북쪽 옛성벽

   
▲ 서쪽 성벽 안에서 본 전경

   
▲ 서쪽 성벽을 위에서 본 전경

   
▲ 읍성 남북을 잇는 안길

   
▲ 장관청

  부산 기장(機張)은 삼한시대 거칠산국 영역으로 비정된다. 갑화양곡으로 불리다가 신라 지증왕 6년(505년) 현이 된다. 신문왕대 9주5소경 개편으로 삽양주(현 양산시)에 편입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지명이 기장으로 바뀌어 동래군의 영현이 된다. 기장은 일광산을 배산으로 한다. 지형을 보면 이 산 아래 베틀(機)을 차린(張) 형국이다. 기장이란 지명이 생긴 연유다.

고려 성종14년(995년) 경주목. 양주군에 속했다가 현종9년(1018년) 울주에 속해 ‘차성(車城)’이란 별호를 얻게 된다. 차(車)는 정수리(首)를 의미하며 이는 지리적으로 해안과 인접한 군사 요충지란 뜻이다. 충렬왕30년(995년)에는 양산군에 속했다가 공양왕 3년(1391년) 독자적인 행정단위 기장군이 된다.

조선 태조3년(1394년) 전국 8도 개편 시 기장현이 된다. 그러나 태종 15년(1415년) 기장현의 위용을 감안해 현감을 지현사(4품이상)로 파견한다. 세조 1년(1456년) 왜구의 득세를 감안해 기장현을 동래진 좌익으로 삼는다.

기장현은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왜적에게 점령당한다. 이듬해 수복하지만 선조32년(1599년) 폐현의 운명을 맞는다. 남쪽을 동래현, 북쪽을 울산군에 복속시킨 것이다. 기장현은 광해군9년(1617년) 되살아난다. 기장현은 조선후기 한말까지 존속하다 고종 32년(1895년) 갑오개혁으로 동래부 산하 기장군이 된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기장에는 군사행정 치소로서 관아가 자리했던 읍성이 있다. 읍성은 중심지 기장읍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에 걸쳐 있다. 기장읍성은 왜구들이 준동하던 고려 말 공민왕5년(1356년) 축성했다고 전해진다. 기장읍성은 본래 현재 기장향교가 있는 기장읍 교리에 있었다. 그러나 우왕 때 읍성이 왜구 침입으로 함락, 관아가 불에 타자 현 위치로 옮긴다. 고려시대 토성은 국방력을 강화하던 세종 7년 석성으로 개축한다. 이때 창원과 울산, 언양 멀리 의성 등지 백성들이 축성에 동원된다. 이런 흔적은 하단 큰 성 돌에 새겨진 고을 이름으로 확인된다. 초축은 둘레 968m 높이 3.6m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석성이며 둘레 350보, 저수지와 우물 1기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왜구에 점령당해 성벽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는다. 왜구들이 해안가 죽성리왜성 축성을 위해 성 돌을 뜯어내 가져 간 것이다.

기장읍성은 지금도 성벽이 제법 길게 남아 있다. 구간은 동쪽 100m 높이 4m, 서쪽 140여m 높이 4m, 남쪽 남문 터 좌우 150여m 높이 1.5∼2m, 북쪽 40여m 높이 3∼4m 등이다. 성벽은 내, 외축 돌을 쌓고 안쪽을 흙과 잡석으로 채웠다. 이를 협축식이라고 한다. 고지대는 바깥은 성 돌이지만 안쪽은 토축이다. 방어는 쉽고 공격은 어려운 조선조 내탁식 축성방식이다. 석축은 넓은 기단석을 줄지어 놓고 위에 지름 또는 한 변의 길이가 1m가 넘는 성 돌을 들여쌓았다. 그리고 위로 크고 작은 돌을 가리지 않고 쌓아 올렸다. 기장읍성은 북쪽이 높아 산성 형식을 띤다. 하지만 남쪽은 낮은 평지성이다. 이에 평산성으로 분류된다. 특이점은 성곽 전체 형태가 말각방형(末角方形)이란 점이다. 이는 장방형 네모서리를 둥글게 쌓은 구조다. 성벽 각 진 지점을 둥글게 처리했다.

성문은 동, 서, 남, 북 4대문을 냈다. 특히 남문은 최근 발굴을 통해 반원형 옹성 기단석이 확인됐다. 지름은 8.2m가량이다. 동문도 앞 밭둑에 반원형 옹성 기단석이 드러나 있다. 입구 좌우에는 문기둥을 떠받치던 성 돌이 양쪽에 툭 튀어 나와 있다. 돌 마다 성문 문지방과 기둥을 끼워 넣었던 문지도리(돌쩌귀) 홈 자욱이 있다. 양쪽 돌 모두 사각형과 원형이 동일한 형태다. 동문 터 남쪽 50m지점에 ‘적대’ 흔적이 남아 있다. 동해안을 감시하던 자리다. 성벽 앞에 수령 공덕비36기가 서 있다. 비석은 과거 읍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향토사학자 공태도 선생(전 국제신문 기자)이 모아 기장초등 앞에 세운다. 그러다가 학교 앞 도로확장으로 이곳에 터를 잡는다. 읍성 북쪽 북문 터는 기장초등 뒤에 있다. 성벽은 왼쪽에 높고 길게 이어져 있다. 다른 방향 성벽과 달리 붕괴가 심하다. 남문 옹성은 발굴과 함께 복원이 진행 중이다. 안쪽에 초기 축성당시 해자가 있다. 지금도 마치 하천처럼 물이 흐른다. 남문 터 밖 15m 지점에는 200m가량 해자가 길게 파여져 있다. 안쪽에 높이 5∼7m로 2∼3단의 석축을 쌓았다. 지금은 복원돼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읍성에는 조선조 수령이 집무를 보던 동헌과 객사, 향사당, 인리청, 군성관, 장관청 등 관아시설이 즐비했다. 성 밖에도 누각 망풍정과 공신루, 관덕정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거의 사라지고 지금은 군사들이 숙식하며 훈련했다는 장관청만 남아 있다. 객사는 궐패를 모시고 수령이 매월 한 두 차례 북쪽을 향해 임금에게 예를 올리던 제례공간이다. 기장초등 자리에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그 아래가 동헌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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