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진 문학(사학)박사

▲ 김충선을 기리는 녹동사(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175-1)

   
▲ 달성 한일우호관(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175-1)

   
▲ 박순진 문학(사학)박사.

 '사성 김해김씨세보'에 의하면, 사야가는 일본에서 1571년에 7형제의 막내로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랫동안 역사의 저 편에 가려져 있던 사야가(김충선)의 실체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연구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라는 임진왜란사를 쓴 일본인 사학자 기타지마 만지(北島万次) 교수는 사야가를 우메키다의 반란(梅北一揆)에 연루되어 처형된 아소 코레미츠(阿蘇惟光)의 일족인 오카모토 에치고노카미(岡本越後守 또는 阿蘇宮越後守)라고 추정하고 있다. 오카모토는 가토오 기요마사의 가신이었고 임진왜란 때 참전하였으며 조선에 귀화했다는 것이다. 그 외 일본에서 ‘사야가’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야가가 일본의 전국시대(센고쿠)의 와카야마 현의 ‘사이카’라 불린 철포부대의 스즈키 마고이치(鈴木孫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야가라는 인물이 조선의 관찬 기록에는 '선조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선조 30년 정유년(1597) 의령의 정진(鼎津)전투에 대한 전과를 기록한 실록 속에 요질기 등 다른 항왜들과 함께 첨지(僉知) 사야가(沙也加)의 공로가 나타나며, 그 이후의 승정원일기(인조 5년)에는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때까지의 기록만으로는 일본인 사야가가 곧 김충선인지 쉽게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로부터 다시 100년이 훨씬 지난 영조대의 승정원일기(영조 37년)에는 사야가가 바로 항왜출신의 정헌대부 김충선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귀화 장수 사야가에 대한 실체가 쉽게 드러나지 않은 이유를 추정컨대, 이때까지 사야가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일본군의 고급 장수로서 자진하여 조선에 귀화하였고 조선에서 조총 및 화약의 개발 등 무기개발에 많은 공헌을 하였기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도 그의 신변보호를 위해 보안 유지를 철저히 했을 가능성이 높고, 한편으로는 그의 상관이었던 가토오 기요마사가 자신의 우선봉장이 적국에 귀순한 사실을 일본 본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보고하지 않고 비밀에 부쳤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런 저런 사유로 사야가는 조선에 귀화한 지 오랜 기간이 지날 때까지도 그에 대한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감추어진 채 시간이 흘러갔던 것으로 보인다.

'모하당문집'에 의하면 사야가는 처음 조선에 출병하였을 때 조선 백성들에게 임진년 4월 12일자로 작성된 효유문(曉諭文)을 배포하였다. 효유서에서 그는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은 나의 이 글을 보고 안심하고 하는 일을 그대로 할 것이며 절대로 동요하거나 떨어져 흩어지지 말라. 지금 나는 비록 다른 나라 사람이고 선봉장이지만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마음으로 맹세한 바 있었으니, 그것은 나는 너희 나라를 치지 않을 것과 너희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까닭은 내 일찍이 이 나라의 교화에 젖고 싶은 한결같은 나의 사모와 동경의 정은 잠시도 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가 조선에 귀화의 의사를 나타낸 강화서(임진년 4월 20일 자)에도 “지금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요,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 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 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동방 성인(聖人)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사야가는 그의 후손들에게 남기는 가훈으로 "한 가지 덕을 닦아서 백 가지 경사가 오게 하고, 한 가지 선을 행하여 자손들이 만 가지 복을 받게 하라(種一德而受百慶於後世 行一善而遺萬利於子孫也)"라고 하였다. 그는 만년에 우록동에 정착하여 조용히 살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향약을 베풀어 덕행의 모범을 보였다. 그가 우록동에서 실시한 향약의 내용을 보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농사와 길쌈을 부지런히 하여 빈궁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관에 대한 세금이나 물품의 납부는 첫 기일을 넘기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또한 ‘이웃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농사의 때를 놓쳤을 때는 모든 주민들이 힘을 합하여 그 사람을 구제할 것이며, 마을 사람이 가난하여 관혼상제를 치루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다 같이 힘을 모아 그 일을 이루도록 하라'고 독려하였다. 필자가 김충선이 남긴 '모하당문집'을 살펴본 바로는 그가 조선의 각 관료들과 주고받은 서신이나 그가 지은 시문을 통해서 볼 때 그의 문장은 세련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무장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풍부한 정서와 시적 감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상도 일원에서는 김충선의 가문을 흔히 우록김씨로 부르고 있으며 김충선은 400년 전 이 땅에 정착한 이래 약 8,000여 명의 후손을 남겼는데, 우록동의 그의 후손 중에는 1970년대에 검찰총장과 내무·법무장관을 역임한 김치열이 있다. 침략전쟁에 반대하며 문화인으로 살기를 원했던 김충선은 오늘날에는 한일교류(韓日交流) 및 우호증진에 가교의 역할을 하는 인물로도 기억되고 있다. 일제시대까지도 일본은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이라는 인물을 인정하지 않고 허구의 인물이라고 억지 주장을 했다.

일본은 그들의 고위급 장수가 일본을 배반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일본사학자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榮孝)가 각종 사료를 통해 김충선의 존재를 확인하고 논문을 발표한 후로는 더 이상 김충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의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한나라 기행'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한 왜군이 있었음을 처음 소개하였고, 이후 하세가와 스토무(長谷川)의 '귀화한 침략병'과 고사카 지로(神坂次郞)의 '바다의 가야금'이라는 역사소설을 통해 사야가의 존재는 일본인에게 대대적으로 알려졌고 일본의 교과서에도 실림으로써 사야가는 명분 없는 전쟁에 반대한 평화주의자로 인식되게 되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을 우호로 연결하는 역사적 인물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와카야마현 현지에 사야가를 현창하는 비석을 세우고 그의 평화정신을 기리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해마다 일본인들이 대구 달성군 우록동에 있는 김충선의 얼이 담긴 ‘녹동서원’과 ‘한일우호관’을 찾아오고 있으니, 400년 전 명분 없는 전쟁에 반대하고 조선의 문화를 흠모하여 수신제가 하다가 이 땅에 뼈를 묻은 그의 선견지명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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