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승 여행가

▲ 화려하고 섬세한 외관을 한 제로니무스 수도원.

 

   
▲ 강재승 여행가

 대항해의 돛 리스본

좁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흐릿한 센스등이 발밑을 밝혀준다. 계단과 벽면만 봐서는 중세시대 건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4층에는 센스등도 들어오지 않는다. 휴대폰 불빛을 밟으며 간신히 5층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문이 굳게 닫혀 있고 도무지 숙박업소 출입문 같지 않다. 뭐가 잘못된 걸까. 다시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갔다.

출입구 앞에 배낭을 짊어진 서양 아가씨 하나가 서성이다가 휴대폰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여기 알베르게 맞냐고 묻는다. 주소는 맞는데 올라가보니 아닌 것 같더라고 하자 그녀가 직접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잠시 뒤 다시 나온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5층을 올려다본다. 나와 똑 같은 경험을 하고 나온 것이다. 그녀가 알베르게로 전화를 걸더니 “여기가 맞단다. 올라가자.” 한다.

다시 5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리자 중년의 남자 리셉션이 문을 열고 안으로 안내한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게 이런 걸까. 막상 숙소 안으로 들어가자 별천지다.

숙소를 찾아 헤매다 우연히 본 마트에서 산 빵과 주스로 주방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내일 아침에 먹을 것들을 공용 냉장고에 넣고 방으로 들어가자 옆 침대에 자리 잡은 50대쯤으로 보이는 아프리카계 남자가 반겨준다. 서울에도 가 봤다는 스페인 국적의 도밍고 메시는 아프리카에서 금광사업을 한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휴대폰을 열어 사업장을 보여준다. 열 명 가량의 깡마른 아이들이 웃통을 벗고 열심히 땅을 파 물로 흙을 씻으며 사금을 채취하고 있다. 저렇게 일해서 하루 일당 1,2달러를 받아 들 아이들의 간절한 손놀림이 애처롭다.

메시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사업장을 보여주었지만 나는 영상을 오래 볼 수 없었다. 나뭇가지를 씹기도 하고 흙을 반죽해 쿠키처럼 구워 먹으며 허기를 속이는 아이들에게 저 터무니없는 일당조차 목숨 같은 돈일 것이다.
아이들은 그 돈으로 시장에서 몇 줌의 옥수숫가루와 배추 한 덩이를 사들고 집으로 갈 것이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옥수수 빵을 뜯어 먹고 고단한 몸을 뉠 때쯤이면 허기는 파리 떼처럼 달려들 것이다.

아이들이 채굴한 금은 부유한 나라의 아기들 돌 반지로, 연인들의 결혼반지와 목걸이로 가공되어 가늘고 흰 손가락과 목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라떼와 빙수, 참치와 베이글에 뿌려져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이 사금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사람에게로 가서 어떤 기능을 하게 되는지 알 수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 금반지, 금목걸이를 한 부자나라 사람들이 금라떼와 금베이글을 먹을 때 이 금이 어떻게 채굴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내게 들어왔는지 알 수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 그저 금은 누군가에게는 절박한 목숨이고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장식일 뿐이다.

영상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휴대폰을 돌려주며 메사가 조금 서운해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도밍고 메시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예약해 둔 시티투어를 하기 위해 에드아르두 7세 공원으로 갔다. 시야가 탁 트여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을 영웅적으로 수습한 품발 후작이 사자와 함께 서 있는 동상 너머로 멀리 태주강도 보인다.

지붕 없는 붉은 투어버스의 2층에 앉아 3만 원 짜리 투어를 시작했다. 앱을 통해 겨우 겨우 도로가의 특정 건물과 조형물을 짐작해 가며 하는 투어라 문자 그대로 주마간산이다.
버스는 코메르시우 광장을 거쳐 리스본 시내를 구석구석 돌았다. 버스가 태주강을 따라 형성된 벨렘 지구에 들어섰다. 벨렘지구는 대항해 시대의 관문으로 세계 각지의 진귀한 물건들이 모여들던 곳이다.

유독 한 건물이 눈에 띈다. 화려하고 섬세한 외관이 예사롭지 않다. 2층으로 된 이 건물의 길이는 300미터에 이른다. 포르투갈의 건축예술의 백미라고 하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이다. 16세기에 지은 마누엘 양식의 건물이다. 마누엘 양식이란 전통적인 고딕양식에 이탈리아, 스페인, 플랑드르 양식을 두루 병합한 건축양식의 걸작으로 통한다.
대항해 시대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역사적인 출정 전야에 이곳에서 기도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스코 다 가마는 스페인과의 대항해 경쟁이 극심했을 무렵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의 영웅이다.
건물 내부에는 예배당과 수도원, 바스코 다 가마의 묘를 비롯한 많은 묘들이 있다. 왕들의 묘도 있고 바스코 다 가마의 영웅적인 탐험을 대 서사시로 찬양한 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의 묘도 있다고 한다. 리스본 출신의 카몽이스는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이야기와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를 엮은 <우스 루지아다스>라고 하는 불후의 작품으로 국민시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이곳에는 또 한 사람의 묘도 있다. 우리에게는 <불안의 서>로 널리 알려진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묘다. 카몽이스와 함께 포르투갈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그는 한 때 포르투갈의 100에스쿠도 지폐의 인물이기도 했다. 리스본에서 태어난 그는 생전에는 크게 평가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여러 유작들이 발견되면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리스본의 풍경과 사람들을 통해 얻은 영감들을 바탕으로 수많은 글을 써 리스본을 상징하는 문학가가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십 수 년 간 남아공 더반에서 살았던 기간 외에는 리스본을 벗어나 본 적 없었다고 한다. 페소아는 매일 좁은 골목길을 배회하며 리스본의 음울과 불안, 결핍과 고독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포착해 냈다.
그러므로 미국의 비평가이자 소설가 조지 스타이너로부터 “페소아는 리스본을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카프카의 프라하와 같은 곳으로 만들었다.”는 상찬을 받은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누군가가 내 삶으로 나를 때리고 있는 것 같다.”던 페소아는 대항해 시대의 영웅 바스코 다 가마와 대선배 시인 카몽이스와 함께 잠들어 있는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할까. 삶의 모진 매질을 견뎌낸 47년간의 대항해를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 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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