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승 여행가

 

   
▲ 리스본 테주 강변에 있는 발견기념비.

 대항해- 운명에 대항해 굴복하지 않는 것

페소아는 '불안의 서'에서 “마치 어떤 사람이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의 단추를 풀고 지갑을 꺼내기 귀찮아서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지 않는 것처럼, 삶은 나를 대했다.”며 매몰찬 삶에 눈을 흘겼다. 47년간의 짧은 인생항해 동안 그를 관통했던 것은 존재론적 불안이었다.

리스본에서 열 네 번의 이사와 스무 번의 이직을 거듭했던 그는 사교의 압박감 보다는 고독에 파괴당하기를 원했다. 어떤 사람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그는 그래서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여겼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행복하다는 그의 진술은 역설이 아니다. 역설이라면 그런 그를 많은 후세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이 역설이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옆에 있는 에그타르트(계란빵)의 원조 빵집도 리스본의 명물 중 하나다. 수도원에서 다량으로 나오는 계란 노른자를 이용해 만든 나타(에그타르트의 포르투갈 식 이름)는 소수의 관계자 외에는 누구에게도 비법을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이른바 ‘겉바속촉’의 이 노릇한 에그타르트는 리스본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식품이다.

버스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테주강변에 범선 모양의 대형 조형물이 눈에 띈다. 발견기념비다. 높이 52미터의 이 거대한 기념비는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용맹한 선원들을 기리기 위해 20세기 중반에 세워졌다. 바스쿠 다 가마가 항해를 시작한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대항해와 관련 있는 수많은 인물 조각상이 있다.

뱃머리 맨 앞에 서 있는 이는 해상왕 엔리케 왕자이다. 포르투의 상 벤투역 벽면의 대형 아줄레주 속에 나오던 그 인물이다. 배의 동쪽 부분과 서쪽 부분에는 서로 다른 인물들이 조성되어 있다.
동쪽에는 바스쿠 다 가마와 마젤란을 비롯한 탐험가, 선교사, 작가 등이, 서쪽에는 왕비와 왕자, 선교사, 화가, 수학자, 여행가, 바스쿠 다 가마의 대항해를 찬양한 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 등이 서 있다. 누가 누군지는 알래야 알 수가 없다. 또 저 인물들이 모두 직접 항해를 한 사람들은 아니다. 생존했던 시대도 조금씩 다르다. 대항해 시대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한 자리에 기리기 위해서 조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포르투갈 사람들은 마젤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는 포르투갈 태생이면서 스페인에 귀화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처음으로 입증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대항해 시대의 라이벌이었던 양국의 관계를 감안하면 마젤란은 포르투갈 국민들에게 애증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손흥민 선수가 일본으로 귀화해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었을 때 우리가 느낄 감정을 생각해 보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마젤란이 언제 어떤 동기로 스페인으로 귀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바스쿠 다 가마와의 미묘한 관계가 이유였던 것은 아닐까. 1인자가 되기 어려운 현실을 직시한 그는 아직 대항해 시대를 준비하지 못한 스페인을 선택해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바스쿠 다 가마다는 동쪽으로 항해를 시작하고, 마젤란은 서쪽으로 출발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모르긴 해도 왠지 둘 사이에는 알려지지 않은 극적인 서사가 숨겨져 있을 것 같다.
조각상 조성 대상에 마젤란을 포함하느냐 마느냐로 고민 꽤나 했을 것 같다. 마젤란의 위업에 비해서는 다소 아쉬운 업적을 남긴 바스쿠 다 가마와 함께 마젤란을 조성한 그들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항해를 앞둔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에 맞닥뜨렸을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입증되기 전이었으니 그들에게 항해의 시작은 죽음을 향한 출발처럼 여겨지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에 비하면 턱없이 조악했을 당시의 선박으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밀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했을까. 바스쿠 다 가마다가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어떤 기도를 올렸을지 상상해 본다.

1497년 4척의 배와 170명의 탑승자로 출발한 그들이 2년 후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 왔을 때는 2척의 배에 50여명만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4만 2천여 킬로미터를 돌아온 항해가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이 숫자가 말해 주고 있다.
19세기 미국의 신학자 윌리엄 쉐드의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이유는 아니다.”라는 말은 일상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의 등짝을 후려치는 영감을 불어 넣어 주는 말이다.
600년 전 자신의 존재 이유, 생의 알리바이를 위해 목숨을 건 항해를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120여 명의 선원들을 생각해 본다. 더 나은 자신을 위해 일상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험난한 항해에 나섰던 그들의 장렬함과 치열함에 가슴이 뜨거워져 온다. 단 돈 300만원도 되지 않는 비용으로 25일간의 유럽여행을 시작한 내게 그들은 말해 주는 듯하다. “더 나은 당신은 내일에 있지 않고, 당신이 가는 그곳에 있다.”라고. 그 말에 용기를 내어 600여 년 전 그들에 이어 오늘 내가 여기서 대항해의 돛을 높이 올린다.

발견기념비와 인접한 곳에 아랫도리를 바닷물에 담근 건축물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양한 건축양식이 혼합된 벨렝탑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위대한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벨렝탑의 지하 공간은 나폴레옹 군에 저항하던 애국지사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활용된 적도 있다고 한다.
매일 저녁이 되면 수감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대서양이 만조가 되면서 강물이 불어 지하 감옥의 창으로 강물이 밀려들어 왔기 때문이다. 물이 차오르면 수감자들은 창살을 붙들고 몸을 위로 끌어 올려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조난당한 사람들은 구조에 대한 희망이라도 있건만 제 나라를 지키고자 저항하다 갇힌 그들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었을까. 겨울에는 차가운 강물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서로에게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까. 긴긴 겨울밤을 차가운 강물 속에서 창살에 매달려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겨울의 벨렝탑은 감옥이 아니라 숫제 사형 집행장이었을 것이다.
행여 누구도 대항해가 시작된 역사적인 곳에서 멈춘 그들의 짧은 항해를 동정하지 마라. 다만 침략자들에 저항한 그들의 신념과 용기 앞에 경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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