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영 세종대 교수

  옥스퍼드 시내에서 버스타고 40분 정도 나가면 영국에서 가장 큰 궁전이라고 할 수 있는 블렌하임 팰러스(Blenheim Palace)가 있다. 왕족이나 교회 대주교의 거주지도 아닌데 궁전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곳으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특히 거대한 정원의 공간 구성과 건축은 영국 낭만주의 운동의 시작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부여 받고 있다.

궁전을 둘러 싸고 있는 거대한 정원은 지리 공간의 높낮이를 활용하여 물과 자연과 아름다운 바로크식 인공 건축물이 어울어져 있다. 궁전 앞뒤로 맞붙어 있는 이태리식 정원은 인공미가 한껏 발휘되기도 하였다. 궁전을 둘러싼 2,000에이커의 거대한 정원은 최대한 자연의 상태를 보존한 것 같으면서도 잘 정돈된 초원으로 만들어 멀리까지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기에 최적의 장소에 있다.

이 궁전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시 바이에른과 프랑스를 상대로 싸웠던 블렌하임 전투에서 말버러 공작(the Duke of Marlborough)의 군사적 승리가 공로로 인정되어 앤 여왕이 포상한 것이다. 이 궁전은 앤 여왕의 재정적 지원으로 추진되었지만 건축학적으로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된 것과 정치적 논란까지 더해져 여왕의 추가 재정 지원이 취소되는 등의 풍파를 겪기도 하였다.

과거 사냥할 때 머물 수 있는 우드스톡 궁전( Palace of Woodstock)이 있었던 곳에 지어진 블렌하임은 명성만큼이나 다양한 역사적 사건으로도 기록된 곳이다. 메리 여왕이 엘리자베스 1세를 이곳에 구금한 적도 있고, 영국 시민혁명 당시 크롬웰 군대의 폭격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곳은 영국 수상을 2번이나 역임한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이 태어나서 유아기를 보낸 곳이기도 하다.

‘위대한’ 영국 정치가로 손꼽히는 처칠은 1900년부터 1964년까지 정치인으로 생활하면서 수상뿐 아니라 내무장관, 국방장관, 공군장관, 해군장관, 상업장관 등 영국의 주요 요직을 두루 경험하였다. 1945년에는 6개월간 영국 군주 조지 6세를 대리청청하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카이로선언,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등 세계사적 회담을 이끌어 나가는데도 기여하였다. 따라서 국제적으로는 히틀러에 맞서 전쟁을 이끈 승리의 지도자로 기억되기도 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영어 사용자의 역사' 등 여러 책을 저술한 공로로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전기와 역사서에서 보여준 탁월함과 인간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연설”의 가치가 인정되었다. 영국내에서는 영국 복지국가의 시작을 알렸다고 하는 실업수당 도입으로 처칠의 명성이 더해졌고, 미망인이나 고아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연금 지급도 하는 등 나름 사회개혁에 노력하기도 하였다.

처칠 장례식 때 많은 국가들이 텔레비젼 생중계를 했지만 아일랜드는 생중계하지 않고 이를 외면하였는데, 이를 통해 아일랜드인과 처칠의 관계를 재확인할 수 있다. 처칠의 할아버지가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고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 비서로 일했다. 또한 본인은 1921년 영국아일랜드조약 체결 때 아일랜드 식민장관이었는데 아일랜드가 영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진력을 다했던 경력이 있다. 그는 영국 제국의 안위가 걸린 문제라는 안보론적 시각에서 아일랜드가 이탈하지 못하도록 노력하였다. 처칠은 아일랜드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민의 이익이고 필요하다면 강압도 행사할 수 있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처칠은 아일랜드의 남북분단에 따른 폐해와 고통에는 냉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근원을 조성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영국제국의 장교로서 수단과 인도에서 영국의 식민통치에 항쟁하는 사람들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블렌하임 궁전에서 태어난 처칠의 태생적 기득권은 평생 영국에서 정치적 권력을 누렸을 뿐 아니라 영국제국의 장교로 식민지에 강압적 권력을 행사했던 모습에도 잘 투영되어 있다. 한편 영국내에서 사회개혁을 통해 약자를 보호한 면모도 있지만 ‘선택적 약자 보호’라는 비평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처칠의 양면성이 제대로 평가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역사의 풍파와 변화상이 층층이 쌓여 궁전의 빛나는 면모가 많이 사라진 블렌하임 궁전을 거닐면서 얻은 처칠에 대한 단상이 역사 평가의 균형감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