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승 여행가

   
▲ 광장 바닥 전체가 물결문양으로 장식된 호시우광장 분수대.

   
▲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의 비극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 도밍고 성당 내부.

 리스본 대지진, 당신은 어디 있나요?

정오 무렵 버스가 출발했던 장소로 돌아왔다. 출발 전에 뒷모습만 보았던 폼발 후작 동상으로 갔다. 폼발 후작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 후 시민들을 위로하고 사고 수습을 진두지휘해 오늘날 아름다운 리스본의 초석을 놓은 정치인이다. 이런 정치인이라면 기념사진을 찍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줄레주로 장식된 넓은 인도를 걸어 호시우 광장 쪽을 향해 걸었다. 어제 앱으로 예약해 둔 리스본 시내 도보투어 한국어 가이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마침 음식사진이 있는 입간판이 보인다. 쌀이 주재료인 빠에야도 있다. 노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흑미 빠에야를 먹고 천천히 호시우 광장 동 페드로4세 동상 앞으로 갔다.
호시우 광장은 13세기부터 여러 공식행사가 열렸던 리스본의 중심지다. 호시우 역을 오가는 기차, 다양한 노선의 버스와 트램, 카페, 레스토랑들이 있어 만남의 광장으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하다. 넓은 광장 바닥 전체가 ‘칼사다 포르투게사’로 장식되어 있다. 포르투갈 전통 문양인 ‘칼사다 포르투게사’는 검은 현무암과 흰 석회암을 교차로 배열한 물결문양의 모자이크 양식이다. 물결은 대항해 시대의 바다를 형상화한 듯 했다.

약속시간인 3시에 나타난 사람은 가이드 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은 없고 오직 나 한 사람만 투어를 한단다. 대개 인원이 차지 않으면 투어는 취소되기 마련인데 가이드가 고맙다. 4만원에 4시간의 1인 도보투어를 진행해 주었다는 게 아직도 잘 믿기지는 않는다.
리스본에 놀러 왔다가 이곳이 좋아 연인과 함께 눌러 앉았다는 가이드의 걸음을 따라 시내 투어를 시작했다. 배낭을 짊어진 나를 본 가이드가 짐을 맡겨 놓을 곳이 있다며 데려간 곳은 광장 옆 ‘부산 아저씨’가 운영하는 기념품 가게였다. ‘부산 아저씨’는 억센 부산 사투리를 쓰는 유럽인이었다. 약간 튀르키예 사람 같아 보였다. 그는 부산에서 오래 살았다면서 일본까지 거론해 가면서 자신이 얼마나 친한파인지 강조한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바이샤 지구(구 시가지)의 상 도밍고 성당이었다. 호시우 광장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이 성당의 외관은 아주 특별하다. 건축미가 뛰어나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운데 큰 출입구와 좌우의 작은 출입구가 검게 그을려 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가이드는 리스본 대지진 당시 발생한 화재의 흔적이라고 일러준다.
1755년 11얼 1일 만성절 축일 미사를 시작하기 직전 리스본에는 전대미문의 대지진이 발생한다. 리히터 규모 9.0에 가까운 이 지진은 덴마크, 오스트리아 등 전 유럽에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리스본 시민 수 만 명이 사망하고 도시의 건물 85%가 파괴되었다. 도시는 일주일간 불탔고 약탈과 살육이 자행되었다.
당시 리스본 인구가 20만 명 이었다고 하니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대부분 다치거나 가족과 재산을 잃었을 것이다.
수많은 문화재와 예술품들도 파손되고 유실됐다. 바스쿠 다 가마 등 대항해 시대 탐험가들의 사료들도 대부분 이때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자 또 한 번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밖에서 볼 때와는 달리 내부가 상상 외로 웅장하다. 압도적인 높이의 천장 벽면을 장식한 아치형 구조물과 그 구조물 마다 예수를 비롯한 성인들의 작은 조각상들이 서 있다. 그런데 그 구조물들도 검게 그을려 있다. 다행히 이 성당은 지진 당시 붕괴되지는 않았지만 화재는 피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미사를 시작하기 전 성당에는 수많은 촛불이 밝혀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곧 시작될 미사를 기다리며 두 손 모아 신에게 기도를 하거나 함께 간 가족끼리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 때 갑자기 온몸과 함께 거대한 성당이 요동치면서 아비규환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미사를 위해 높은 촛대 위에 밝혀둔 촛불은 바닥으로 나뒹굴었을 것이고 근처에 있는 사물들을 태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성물들이 나뒹굴고 사람들도 넘어지고 뒤엉키며 그렇게 만성절 축일의 비극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날의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불에 그을린 흔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성당 측의 의도가 전해져 온다.

신에게 기도를 올리려 성당을 찾은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죽은 가족과 이웃을 보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있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신이 노해서 우리를 심판하는 것인가? 리스본의 대지진은 그들의 굳은 종교적 신념체계도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신이 노했다면 누구에게 노했을까. 당시 리스본은 식민정책과 노예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도시였다. 신권과 왕권, 귀족과 평민, 부자와 빈자의 균형추는 급격하게 한 쪽으로 기울었다. 성당은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었다. 리스본은 성당과 수도원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 신권에 도전하는 왕은 언제 제거 당할지 몰랐고, 유대인과 인본주의자, 이교도는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성당에는 시신 타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사제들은 회개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만성절 축일에 무너져 내린 성당과 수도원을 보고도 사제들은 다음 미사에서 더 목소리 높여 회개하라고 애꿎은 신도들을 다그쳤을 것이다. 종교는 종종 그랬다. 강자는 항상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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