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민수 중앙노동경제연구원 객원교수

▲ 윤민수 중앙노동경제연구원
장모님은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일찍 결혼해 1남 3녀를 낳고 억척같이 자식을 키우신 분이다. 그 시대에는 대부분 남편의 사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오롯이 자식들만 바라보고 살아오신 어머니이기도 하다. 거리에 버려진 가구도 쓸만한 것이 있으면 다시 고쳐 쓰기 위해 집으로 가져오시기도 하고 주변에 손바닥만한 텃밭이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일구어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게 만드는 분이시다. 그렇게 본인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신념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로인해 가끔 나와 대립할 때도 있을 만큼 주변을 피곤하게 하시기도 한다. 그런 강한 분이 언젠가부터 조금씩 최근의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서울대 병원에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지만, 한 평생을 대쪽같이 강하게 살았기에 스스로 인정하기가 쉽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한다.

며칠 전 성당에 저녁 미사 해설을 하시는 분이 사정이 생겨 내가 대체를 하게 되어 퇴근 후 성당에 가야 했다. 그런데 아내도 차를 쓰고 큰 아이도 차가 필요하다 하여 차를 주었기에 회사를 마치면 어떻게 성당에 가야지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퇴근 무렵에 아내로부터 전화가 와 장모님께 이야기해서 나를 데리러 오기로 했다고 한다. 6시부터 기다렸지만 오시지 않는 것이었다. 이상하다고 해서 장모님께 전화를 드리니 장모님은 “윤서방.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장모님. 주차장에 차가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장모님은 “어. 이상하다.” 하시면서 주변의 건물 이름을 찾는데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 전화상에서 느껴졌다. 나는 “주변에 혹시 보이는 건물이 무엇인가요?”하고 여쭤보니 “금...속 재료...인가 보인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우리 건물보다 조금 앞에 계신다고 한 칸 뒤로 오시면 된다고 설명해 드렸더니 그 이후 10분 뒤에 우리 건물 주차장에 도착해 전화를 주셨다. 차를 타니 장모님은 “큰일이네. 내가 이것도 기억 못 하네.”하고 안절부절못하셨다. 나는 “장모님. 그럴 수 있죠. 저도 가끔 못 찾을 때가 있는데요.”하고 안심을 놓아 드리려 했지만, 장모님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언젠부터인가 장모님께서 평일에도 성당에 가시고 싶어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본인의 마음은 간절하신 것 같은데 다른 생각에 미사를 놓치시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하느님을 찾아가시고 싶어 하는 장모님을 내가 직접 챙겨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갈 준비를 하면서 장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장모님. 성당에 가시는지요?” 하니 장모님은 신나신 목소리로 “어. 성당에 가야지.”하는 것이었다. “그럼 10시 15분까지 모시러 가겠습니다.” 하니 장모님은 웃으시면서 기다리시겠다고 화답하셨다. 장모님을 모시고 성당에 가는 차 안에서 연신 웃으시는 장모님은 보니 내 마음도 행복했다. 미사를 마치고 나와 다시 집으로 모셔다드리는데 차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나는 죄가 많은 것 같아. 따로 봉사도 하지 않아서 하느님이 나를 용서하지 못하실 거야.” 나는 “장모님. 그런 생각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장모님은 이미 1남 3녀를 잘 키우셨기에 충분히 하느님의 자식으로 봉사를 하셨습니다. 사람을 죽인 죄인도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장모님은 분명히 천당에 가실 겁니다.” 하니 장모님은 “윤서방은 하느님이 나에게 보낸 사람같애. 우리 집에 모든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달려와 해결해 주고 가정도 잘 돌보고 성당에도 열심히 다니고 내가 그렇게 잘해 주지 못한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나를 챙기는 자네를 보면 하느님이 분명 나에게 보내신 게 맞아.”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찡해 옴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은 좋은 글이 있으면 따로 보관해 책으로 내야지 하는 생각에 신문에 기고하는 것을 조금 자제했지만 장모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아 독자들과 따스한 마음을 나누고 싶어 다시 펜을 들게 되었다.
하느님이 보낸 사람... 우리는 누군가에게 각자의 신이 보낸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인생은 짧다. 지구가 만들어진 45억여년을 하느님이 보실 때는 기껏 100여년을 사는 사람은 하루살이들로 보일 것이다. 이런 하루살이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산다. 하느님이 보실 때는 얼마나 한심하다고 생각하실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배려는 감사를 만나 사랑을 잉태한다. 한 번씩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장모님의 기억 속에는 결국 나는 하느님이 보낸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짧은 인생, 소중한 사람들을 더 열심히 사랑하고 배려하고 챙기며 살자. 언젠가 하늘에서 다시 만났을 때 서로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곁에 있는 그와 그녀에게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라 느낄 수 있도록 가슴 깊이부터 온 몸에 채워진 사랑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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