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영 세종대 교수

  런던의 금융가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상품들로 진열된 가게가 눈을 사로 잡아서 들어가게 되었다. 각종 명품들이 진열되어 있고 핸드백이나 시계 등의 소품 뿐 아니라 거대하고 정교한 말 형상의 장식품과 멋진 오토바이 등 다양한 물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지하층에도 각종 보석을 포함하여 다양한 물품이 있는데, 이런 물품은 구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정기간 대여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쉽게 말하면 고급 전당포(pawns)였던 것이다.
소비와 향략에 흥청거리는 돈 많은 런던은 돈만 있으면 세상에 두려울 것도 없고 아름다운 그 어떠한 것도 살 수 있으며 구매하기 어려우면 잠시 빌려서라도 극도의 사치를 부려볼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 화려하고 거대한 왕립거래소(The Royal Exchange) 바로 옆에 이런 고급 전당포가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왕립거래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1531년) 금융거래소인 안트워프(Antwerp) 부르스 (Bourse)를 모델삼아 1566년 왕실 대리인 토마스 그레샴(Thomas Gresham)이 만든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1571년 공식적으로 개장하여 왕실 칭호와 주류 판매 면허를 준 곳으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유지되었으나 17세기 후반에는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철거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7세기 영국의 건축적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화재로 외관이나 구조 등 시대에 따른 변화상을 겪기는 하였다. 1844년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재건된 왕립거래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에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런던의 금융 중심가에 당당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영국의 영광”, “런던의 눈”이라는 별명에서 단적으로 이해할 수 있듯이 런던 금융가 중심부에 자리한 왕립거래소는 여러가지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대영제국의 상업적 거래와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세계적인 상업을 위한 개방형 형태의 안뜰은 서로 다른 영업소를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길로 이어져 있다. 돈과 권력과 화려함의 극치이자 타락과 위선의 장소로 풍자되는 왕립 거래소의 외관은 런던의 상징이 될 뿐 아니라 대영제국의 얼굴이기도 하다.
18세기 영국은 주식, 채권, 어음 등 금융상품 시장이 활성화되는 금융혁명(The Financial Revolution)의 시대를 거쳤다. 이는 산업혁명의 기폭제가 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치와 문화, 행정, 경제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변화를 가져오는 소위 중요한 경제적 현상이었다. 이러한 금융시장의 부상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 국가가 지정한 공식 금융 상품 거래소로서의 왕립거래소라고 할 수 있다.

각종 금융과 재화가 거래되는 왕립거래소에 명품 사치품으로 치장할 수 있는 쇼핑가로서의 폰스(pawns)가 연결 되어 있다. 폰스는 왕족, 귀족, 신흥 부유층 등 돈과 권력 장악적 측면에서 사회지배층이라 인정되는 집단이 사치품 소비를 위해 몰려 들었던 공간이다. 건물내 복도 형태로 이어진 명품샵은 런던뿐 아니라 베니스, 파리, 암스테르담 등 각종 무역 중심지에서 유사하게 발견할 수 있는 상업시설이다. 이런 형태의 상업 시설은 계절의 변화나 비가 자주 오는 런던의 짖궂은 날씨의 제약을 받지 않고 꿈속의 왕자님과 공주님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당시 사치품으로 분류되었던 펜과 문구류, 서적, 가발 등도 판매되었다. 폰스의 발코니에서 런던의 파노라마 전경을 감상할 수 있으므로 단연 관광 명소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왕립거래소는 1980년대 런던국제금융선물거래소가 입주하면서 과거의 화려했던 시대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2001년 리모델링을 통해 현재는 고급 쇼핑 및 식당가로 탈바꿈하였고 1층에는 1707년에 세워진 포트넘 앤 메이슨(Fortnum & Mason) 백화점이 들어서 있고 건물 전체적으로 가운데 공간이 비어져 있는 1층 중앙에 자리한 레스토랑에서는 비용을 지불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공간을 즐길수 있는 곳으로 변모되어 있다. 과거 왕립거래소의 출입 그 자체가 신분적 제약을 받았던 것에 비하면 그나마 조금은 숨통이 트인다.
비록 내가 들어갔던 폰스는 과거 폰스의 영광을 상점의 이름으로 이용하여 왕립거래소 옆쪽에 따로 있는 고급 전당포였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과거 사치품 쇼핑 천국이었던 폰스와 대영제국의 재화 거래소였던 왕립거래소에 들어가 변화된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어서 영국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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