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승 여행가

 

   
▲ 리스본을 상징하는 트램.

상처 - 받으면 비극, 안으면 예술

알파마 지구로 갔다. 알파마 지구는 리스본이 발전하기 시작한 최초의 지역이다. 그래선지 이곳 사람들은 리스본에 산다고 하지 않고 알파마에 산다고 할만큼 자부심이 대단하다.
리스본은 평지가 별로 없이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다. 무지막지한 산이 아니라 오르막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덕분에 사람 사는 정취가 더 잘 느껴진다. 개울처럼 돌아가는 좁은 골목길, 서로의 어깨를 부비며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정겹다. 웬만한 좁은 골목에도 오래된 수동식 트램이 지나다녀 고풍스런 도시의 정취를 더해준다.
무거우면서도 어둡지 않고, 아름다우면서도 화려하지 않으며, 기품 있으면서도 도도하지 않은 이 곳을 사람들은 낭만의 도시라고 한다. 바다와 강, 고풍스런 건물들이 즐비한 골목길과 그 골목길을 오가는 트램, 클럽과 바에서 흘러나오는 포르투갈 전통음악 파두의 감성적인 선율, 감미로운 포트와인과 환상적인 일몰은 리스본을 낭만의 도시로 명명하는 데 토를 달 수 없게 한다.

골목길을 걷다보면 <불안의 서>를 남긴 페르난두 페소아가 떠오른다. 그가 살았던 집도 여기서 머지않을 것이다. 페소아는 매일 이 골목을 걸으며 고뇌하고 사색했을 것이다. 작고 깡마르고 병약했던 페소아는 평생 우울과 불안, 고독, 불행 속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탐색했다. 그의 글 몇 몇 대목만 봐도 알 수 있다.
“나에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리라. 아니라고.”
“절망에 잠긴 내 방에서 슬픔으로 나는 글을 쓴다. 항상 그랬듯이 나는 혼자이며, 앞으로도 항상 혼자일 것이다.”
“가에이루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하나의 불안한 기계였다.”
가에이루라는 그의 친구나 연인이 아니다. 가에이루는 그의 헤테로니모이, 즉 페르소나이다. 생전의 그는 100여개의 이명을 사용했다.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의 부산물이었다.

“나는 생각하고 느끼지만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단지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장소일 뿐이다.”라는 이 글에서 말하는 장소가 바로 헤테로니모이이다. 헤테로니모이는 상대적인 것, 이분법적인 것, 사회적인 규범 등을 벗어난 특별한 공간이다. 페소아는 자신의 말처럼 하나의 불안한 기계이기도 했지만 그는 하나의 공간이기도 했다. 음울하고, 고독하고, 불안한 공간이자 환상적이고 절대적인 공간이었다.
“나와 인생 사이에는 아주 얇은 유리 한 장이 있다. 또렷하게 바라보며 인생을 이해한다 해도 결코 만질 수는 없다.”는 그의 탄식이 들려오는 듯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지금도 그가 여기 골목길을 서성이고 있는 것 같다. 그를 만나면 이렇게 말해 주고 싶어진다.

“생을 만지려고 애쓰지 마세요. 유리 너머로 바라보는 생도 볼만하니까요!”
포르투갈 민요 파두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라가 살던 마을 모라리아는 누추하지 않을 정도로 소박했다. 빈민촌이라 해도 크게 틀려 보이지 않았다.
가난한 무어인(아프리카 무슬림)들이 살던 이곳에서 세베라는 1820년 태어났다. 태어나 보니 아버지는 집시였고 어머니는 매춘부였다. 선택의 여지없이 세베라는 매춘부가 되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의 삶이 어떻게 일그러져 있는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집시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은 그녀는 열두 줄의 포르투갈 기타 기따라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불렀다. 파두였다. 파두는 한국의 ‘한’처럼 번역 불가능한 ‘사우다지(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애타는 열망)’라고 하는 민족적 정서가 담겨 있어 매우 애조 띤 음악이다. 당시의 파두는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뱃사람에 대한 그리움, 뱃사람들의 외로움과 향수를 달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파두는 2011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삶이 유리 너머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 페소아처럼 그녀도 유리 너머 삶을 만지고 싶었을 것이다. 명백한 자신의 삶이건만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나 있었을까 페소아처럼.
유리 너머 닿을 수 없는 삶을 향한 애타는 갈망은 그녀의 노래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세베라의 짙은 사우다지는 파두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뛰어난 가창력과 흉내 낼 수 없는 사우다지를 담은 세베라의 파두는 리스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국적이면서 우수어린 외모까지 갖추었던 세베라는 귀족들의 이목을 끌었다. 세베라는 귀족들의 사교장인 살롱에 진출함으로써 파두의 저변을 확대하는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다 한 백작을 만나게 된 세베라. 부유한 귀족출신 백작은 세베라의 재능과 미모에 매료되어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지만 둘 사이에도 얇은 유리 한 장이 있었다. 그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너무도 어린 나이 때부터 매춘부로, 선술집의 파두 가수로 살아온 그녀에게 백작과의 사랑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신기루였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또 하나의 장애가 있었다. 폐결핵이었다. 스물여섯. 하늘은 그녀에게 파두에 대한 재능과 미모만 주었을 뿐, 청춘의 사랑도, 평범한 삶도, 충분한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세베라는 그렇게 한 많은 26년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베라 탄생 100주년이던 1920년 알파마 거리의 한 가난한 악사는 예쁜 딸을 얻었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그녀는 리스본 부두에서 오렌지를 팔다 선술집에서 파두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아말리아는 뛰어난 미모와 천부적인 음악성으로 파두의 새로운 장을 연다. 포르투갈을 넘어 전 유럽과 남아메리카에까지 파두를 전파한다. 전통민요 파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그녀는 파두의 세계화에 크게 이바지한다. 세베라가 파두를 중흥시켰다면 아말리아는 파두를 세계적인 음악으로 성장시켰다. 1999년 그녀가 79세로 사망하자 스페인은 3일간의 국장으로 그녀를 예우했다.

상상회로를 가동해 본다. 아말리아는 아무리 봐도 세베라의 환생 같다. 파두를 사랑했던 세베라는 평범한 삶을 사는 파두 가수에 대한 한(사우다지)을 남기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 한이 다시 알파마에서 태어나 파두 가수를 하게 한 것은 아닐까. 26살에 요절했던 그녀가 아말리아로 환생해 79년을 살면서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파두의 여왕 칭호를 얻은 것이라면, 매춘부로 산 전생의 한이 어느 정도는 풀리지 않았을까.

질곡의 고통 속에서 살다 간 페르난두 페소아와 마리아 세베라. 하지만 그들은 고통과 상처를 끌어안고 마침내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했으니 그들의 영혼만은 충만하리라. 상처는 받으면 비극이 되고, 안으면 예술이 된다.
상 조르제 성은 리스본의 7개 언덕 중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성 입구에 많은 관광객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전망이 좋기로 유명한 탓이다. 갈등 끝에 가이드와 나는 입장을 포기했다. 입장료를 아낀 것을 위안 삼으며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에서 잠시 주위를 조망하고 리스본 대성당을 거쳐 마지막 코스인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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