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태 칼럼니스트 공학박사

흑백 TV에서는 연일 박정희대통령 서거 사실을 알리며 대형사진과 국화꽃의 유해를 모신 영구차는 청와대를 떠난다. 까마득한 기억으로, 남겨진 삼남매의 왜소하고 슬픈 모습이 우리국민의 통곡하는 모습과 겹쳐 지나갔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피살되어 전두환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장이 정권을 물려받으며 이 나라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듬해 대학 신입생으로 학교에 입학했고, 학기 초부터 분위기는 어수선했지만 우리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진 통제나 제재 같은 것은 없었다. 부산과 마산에서부터 시위가 격화되어 올라오고 있었나보다, 이른바 부마사태인데, 남동풍이 불면 걷잡을 수 없다고 했다.

그 시간 중간고사 시험 준비를 하느라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서 아침도 거른 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오전 강의가 없었고 오후부터 수업은 시작되므로 정신없이 책 속에 파묻혀 있을 때 도서관 내부 입구에서는 큰소리가 들려오며 전역자 형들이 스피커를 들고 모두 도서관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아침 일찍 와서 잡은 자리가 나무 아까워서 밖으로 나가기를 주저하니 오늘부터 도서관은 문을 닫고 더 이상 개방하지 않는다며 모두 나오라고 했다. 학교 관계자도 아닌 예비군복을 입은 전역자 형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모두 밀려서 나가니 본관 앞에는 많은 학생들이 앉아서 머리띠를 두른 형들의 통제 하에 앉아있었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노태우도 물러가라 물러가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후렴 3번” 이것이 그날 새벽부터 나와서 공부하다 본관 1호관 앞에서 배운 최초의 시위가 였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노래는 후크송처럼 머리와 입에 남아있을 만큼 중독성이 강했다. 이를 필두로 연일 계엄철폐와 민주화 추진을 희망하는 집회와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학교는 전역자 형들이 주축이 되어 강의실까지 와서 수업을 방해하며 시위에 동참하기를 촉구했다. 당시 우리 학교의 교수님들은 매스컴의 대학 평교수협의회의 시국선언문 발표나 해직교수의 복직 등과 같은 거창한 이슈대신 옆구리에 책을 끼고 강의실 유리너머 걱정스레 우리를 쳐다보는 모습만 지금 기억에 있다.

TV와 매스컴에서는 연일 대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고 있다는 소식이지만 우리에겐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 해에 광주에 계엄군이 투입되고 2학기부터 학교 정문 앞에 모래주머니 참호의 기관총과 군인들이 경비를 서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검문을 하고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그저 교문 앞에 서 있기만 했다. 마치 지금 전통의상인 한복을 입고 경비를 서있는 광화문의 수문장처럼. 오히려 교실에 있는 우리를 윽박지르고 도서관에 있는 친구들을 밖으로 나오라며 작은 무질서, 무정부 사태를 만들고 있는 전역자 형들이 더 무서운 기억으로 남는다. 학교 앞 거리에서 전역자 형들과 친구들이 어깨동무하고 진출하자 최루탄이 터지고 온 동네가 매운 연기로 가득했다.

대구 반월당과 중앙파출소 그리고 제일서적 앞에서 동성로 한일극장 앞의 대로는 전경과 시위대가 대치중이었다. 지랄탄이라는 최루탄이 어지러이 머리 위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학생들의 화염병 투척 등 과격한 시위와 경찰의 최루탄 발사는 당시의 혼란 속의 시위 공식이었다. 질서를 잡기위해 백골단이라는 흰 헬멧을 쓴 전경과 사복경찰들이 주동학생들을 체포하고 있을 때, 시민들이 나서서 왜 어린 학생들을 잡아 가냐며 그들을 말렸다. 급기야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이 개입했다. 이른바 넥타이부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자동차 경적을 울려 시위대에 힘을 보탰고, 시위대에 박수를 치며 그들을 격려하였다. 이른바 박수부대라고 불리는 우리네 이웃들이었다.

광주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공수부대원과 학생들이 충돌하면서 80년 ‘광주 민주화사건’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지만 모든 곳이 그렇지는 않았고, 당시 시민 모두는 운동권이었다. 지금 일부 정치인들이 자랑처럼 이야기하는 그들만의 특권은 아니었다. 당시의 민주화의 주역은 묵묵히 한강의 기적을 불러일으킨 소시민들이었고 주부들이고, 회사원이었다. 묵묵히 싸우면서 건설하던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나라의 산업화와 민주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 이듬해 군 입대를 하고 정국은 수습과 안정을 찾아 급속도로 진정이 되었다. 그 이후 고요함 속에 제 5 공화국 내내 간헐적인 시위와 소요가 있었다. 아마도 현재 지금의 586 일부 정치인, 686 정치인들로 대표되는 사람들이 그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그들도 학생의 신분으로 시위에 참여한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그들만이 독재의 억압에 맞서 싸운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지금도 생각나는 미문화원 방화사건, 이 같은 범죄는 혼란기라고 저지른 불법이 합법화는 되지 못한다. 민주화의 봄이라고 부르는 1980년대의 이 사건은 세월이 한참이나 지난 지금 많이 과장되고 확대된 면을 곳곳에서 발견한다. 소요를 막고 사회질서를 잡기위한 경찰, 군인들도 우리의 이웃이자 그 시대의 희생자였지 그렇게 비열하고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은 일부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더더욱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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