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승 여행가

▲ 코메르시우 광장 앞에서 바라본 4.25다리와 테주강.
 히베이라 궁전은 비상하듯 당당하고 우람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 다만 1755년 11월 1일 10시까지만. 대지진 이후 왕궁이 있던 자리는 코메르시우라는 이름을 얻고 리스본 최대 광장이자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오른쪽으로 멀리 4.25다리가 보인다. 1974년 4월 25일 살라자르 독재를 종식시킨 카네이션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다리다. 광장과 테주강 강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다. 연인들은 핑크빛 시선을 주고받으며 해변을 거닐었다.

가이드와 헤어지고 배낭을 맡겨둔 ‘부산 아저씨’ 가게에 들러 작은 기념품 몇 가지를 구입했다. 이제 포르투갈에서 이틀간의 일정이 끝났다. 가이드가 휴대 전화로 예약해 준 스페인 마드리드행 심야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일찌감치 터미널로 갔다. 다음 여행지인 그리스 아테네 가는 비행 편을 마드리드발로 예매해 두었기 때문이다, 리스본에서 곧장 가지 않고 굳이 마드리드로 가는 이유가 있다. 당초 한국에서 세운 대략적인 계획은 약 한 달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난 후 종착지와 가까운 포르투갈을 먼저 둘러보고 다시 스페인으로 가서 스페인을 여행한 다음 아테네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드리드발 아테네행 항공권을 한국에서 미리 예약했던 것인데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마드리드는 땅만 밟고 지나가는 것이다.

순례길 막바지에 만났던 스페인 마드리드에 사는 교민 최진석 선생은 마드리드에 도착하면 꼭 연락을 달라고 했다. 마드리드 안내는 물론 맛있는 식사대접도 하겠다며 한국인 특유의 정을 내었다. 꼭 그러마고 약속을 했기에 최소한 차라도 한 잔 나눌 생각이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마드리드행 버스 시각과 터미널 위치까지 찾아서 알려준 고마움에 답례를 할 기회조차 날려 버린 것이 두고두고 걸린다.

60살은 계획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기대를 외면하고, 얼마나 상상력과 자유를 통제하는지를 충분히 이해하는 나이건만 나는 아직도 이 모양이다. 그렇지만 또 60살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데서 오는 괴로움을 피해갈 줄 아는 나이이기도 하다. 계획대로 다 된다면 그것이 어찌 여행이겠으며 뜻대로 다 된다면 그것이 어찌 인생이겠는가? 인생의 쓴맛을 보기 전까지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다 있다.

한 때 천하를 호령하던 프로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 마이크 타이슨도 그랬다지.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지. 내게 줘터지기기 전까지는!” 그런 그의 인생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으니 자신의 말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최 선생이 알려준 마드리드행 버스 터미널 사이트에서 리스본 투어 가이드가 예매해 준 승차권으로 탑승한 버스는 9시간만인 다음날 7월 5일 오전 7시(마드리드는 리스본 보다 1시간이 빠르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드리드 터미널에서 전철을 타고 공항 근처까지는 갔는데 역 바깥으로 나와 보니 아직 공항까지 2,3킬로미터 정도 거리가 남았다. 출발 시각이 임박해 오는데 낭패다. 정차한 시내버스가 보여 기사에게 물으니 여기서 공항 가는 버스는 없단다. 택시도 여기서는 잡기 어렵고 반대편으로 건너가 버스 타고 좀 더 가서 택시를 타란다, 아니 엎어지면 코 닿을 데를 버스타고 가다가 다시 택시를 타라고? 그것도 반대 방향으로? 버퍼링이 시작됐다. 내 표정을 읽은 기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니 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준다. 나를 택시에 밀어 넣은 그가 엄지를 세워 보인다. “그라시아스 아미고!(고마워 친구)”

승차하자마자 조급한 마음에 “빨리 빨리”라며 기사를 몰아붙였다. 기사가 몇 번 터미널이냐고 묻는다. 내가 버벅거리자 길가에 차를 세우며 한가로이 묻는다. “3터미널까지 있는데 몇 터미널이냐고?” 할 수 없이 모바일로 받은 티켓을 봐도 몇 터미널인지 알 수가 없다. 기사에게 보여줘도 자기도 모른다. “일단 공항으로 가서 물어보자. 출발 고, 고!” 그제야 택시가 달리기 시작한다. 공항 터미널에 닿자마자 차가 선다. 내가 황급히 기사에게 부탁했다. "아테네행 비행기는 몇 터미널로 가야하는지 터미널 직원에게 물어봐 달라.” 순간 ‘뭐 이런 여행자가 다 있나.’하는 한심한 표정을 잠시 짓던 기사가 시동 걸린 차를 내버려 두고 터미널로 들어간다. 나도 뒤따라가며 택시를 뒤돌아본다. 한국과는 달리 유럽은 차량도난의 위험이 높을 텐데 시동 걸린 택시를 두고 자리를 뜨는 기사가 고맙기만 하다. 그가 나보다 더 절박한 태도로 터미널 직원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다시 택시로 향한다.

2터미널에 도착하고 요금을 지불하자 기사가 펜으로 뭔가를 급히 적더니 내게 쪽지를 건네준다. “여기로 가서 타면 돼” 메모지에는 109. 110, 111 숫자가 적혀 있다. 탑승 게이트인 것 같다. 이 와중에 이런 친절까지 베풀어 주다니. 역시 사람은 어리바리 해야 하나보다. 그래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아마 기사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 녀석은 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할지도 몰라.’ 뭐, 그래도 내가 한국인이라고 밝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전 국민이 끌어 올려놓은 국격을 깎아내릴 일은 없었다. “무토 오브리가도!(엄청 고마워!)” 나의 인사에 기사가 손을 흔들어 주며 사라져 간다. 멀어지는 택시 뒷모습을 보며 팁을 줄걸, 가벼운 후회가 들었지만 택시는 이미 떠났다. 리스본에서 한국인 가이드에게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변명 같지만 얇은 지갑 탓만은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팁은 자기과시용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이 많아 팁 문화를 별로 탐탁찮게 생각하던 습관이 작동한 탓이 컸다. 이렇게 꼭 줄만한 상황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답례를 해야 했는데 아쉽다. 그나마 스페인도 특별히 팁 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아니라 다행이다.

탑승 게이트를 찾아 달렸다. 만약 탑승에 실패하면 많은 것이 틀어져 버린다. 택시 기사 팁도 주지 못하는 처지에 아테네행 티켓을 다시 구입해야하는 상황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아테네 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다. 출국 보안검색대 게이트를 통과하던 배낭이 문제였다. 요원 하나가 배낭을 열어 짐을 다 꺼내란다. 풀어 놓았던 허리띠 차랴, 컨베이어 타고 가는 소지품 챙기랴 정신 사나운데 배낭 속 짐까지 다 풀어놓으라니, 아이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아까 대기 중에는 공항 매점에서 구입해서 포장도 뜯지 않은 스낵도 버리라고 해서 버렸는데 이번엔 스킨로션을 압수해 버린다.

쏟아 내었던 물건들을 쓸어 담고 간신히 비행기에 탑승해 앉으니 진이 다 빠져버린 느낌이다. 그래도 리스본에서 출발해 15시간 만에 무사히 아테네행 비행기에 탑승한 것만 해도 대단한 업적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마드리드행 버스가 운행하는 버스 터미널을 검색해서 알려 준 스페인 교민 최진석 선생, 버스 터미널 앱에 들어가 버스표를 예매해 준 리스본의 한국인 가이드, 한심한 여행자를 태워 극적으로 탑승에 성공하게 해 준 택시 기사까지 세 조력자가 없었더라면 이번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그시 눈을 감고 세 조력자들에게 나를 대신해서 하늘이 답례해 주기를 축원하고 있는데 승무원이 황급한 표정으로 뭔가를 물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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