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영 세종대 교수

  체코의 민족혼을 볼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알폰스 무하(Alfons Maria Mucha, 1860-1939)의 작품을 보는 것이다. 예술에 소질이 있었던 무하는 파리에서 머무는 동안 생계를 꾸리기 위해 책이나 잡지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하면서 인지도를 높였다. 우연한 기회에 다급하게 요청된 파리 연극계 최고 배우인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1844-1923)의 포스터 ‘지스몽다(Gismonda)’를 제작하게 되면서 일약 포스터 아트의 대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명성을 얻은 무하는 1900년에 개최될 파리 세계박람회의 실내 장식을 할 수 있도록 공식적인 의뢰를 받게 되었다. 이를 위해 발칸 반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영감을 얻고 스케치를 하면서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하에서 고통받는 슬라브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이 경험은 훗날 무하의 기념비적 작품인 ‘슬라브 서사시(The Slav Epic)’를 그리는데 많은 아이디어를 주었다.

나는 무하의 거대한 ‘슬라브 서사시’를 보기 위해 걸어서 블타바강(Vltava river)을 건너 프라하 현대미술관을 찾아 나섰다. 미술관을 샅샅히 살펴보았는데도 거대한 그의 작품을 찾을 수 없어서 속상한 마음에 작품의 소재를 질문했더니 현재 다른 도시에서 전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먼 걸음을 마다 않고 찾아간 것은 작품을 직접 보기 위한 것인데, 과거의 정보를 가지고 접근했던 낭패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슬라브 서사시’는 1912-1926년 사이에 완성된 20여점의 기념비적 회화로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국가로 탄생한 10주년 기념으로 프라하 시에 공식적으로 기증되었다. 체코와 슬라브 민족의 고대 기원에서부터 중세와 종교 개혁, 합스부르그 제국, 슬라브 민족에게 독립을 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까지 포함하여 슬라브 문명의 발전을 그린 작품으로 슬라브 민족의 혼을 담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무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무하 갤러리에서 그의 포스터 아트 스타일을 꼼꼼하게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상을 통해 ‘슬라브 서사시’ 작품도 감상할 수 있어서 그나마 직접 관람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무하의 작품을 뒤로 하고 슬라브 민족의 또 다른 페이지를 장식한 역사는 무하 갤러리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공산주의 박물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멀리서도 확인 가능한 거대한 현대식 건물은 외관에 붙은 공산주의박물관이라는 팻말과는 달리 실제로는 건물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어서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박물관 내부 전시를 보면 이 시대를 새롭게 조명하여 평가하려는 것 보다는 공산주의 광풍의 시대가 어떤 식으로 흘러 갔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보였다.

시간적 순서로 테마가 있는 전시지만 좁은 공간에 다양한 설명과 전시물이 빼곡하여 빛바랜 노트를 나열해 놓은 느낌이 드는 것은 전시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1948년부터 시작하여 1989년 체제 전환을 이루기까지 공산주의 시대 그 자체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체코가 어떻게 이 시대를 바라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3가지로 보였다. 하나는 핵심 전시실과는 살짝 동떨어져 있는 화장실 입구 바로 옆에 공산주의 지도자의 석상이 서 있었던 것과 전시 거의 마지막에 설명된 공산주의 시대 사망자 숫자이다.

1948-1989년까지 205,486명이 감옥에 갇혔고, 248명이 정치적 이유로 처형되었으며, 145명이 국경을 넘었다는 이유로 총살되었고 96명이 전기 감전사 하였으며 11명이 익사하였다. 50구의 시체가 국경강에서 발견되었고, 16명은 체포보다 자살을 택했고 282명이 비명횡사하였다. 584명의 군인이 국경수비대로 근무하다가 순직하였다는 설명이 일정 정도 평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박물관을 거의 빠져 나오려고 하다가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대하는 포스터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우크라이나가 용기를 내어 맞서는 것에 대한 지지였는데, 공산주의 박물관에 붙어 있는 것이 더 역설적으로 보였다. 게다가 기념품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티셔츠에 러시아 인형이 악당 형상을 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시대 종주국인 소련과 체코는 위성국가로서 우호관계였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옛 정’보다 오히려 소련(러시아)의 속성을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을 반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9세기에 창건한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이자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서 화려한 면모가 상당히 남아 있는 프라하에서 공산주의 국가가 세워졌다가 1993년 체코 공화국이 성립되기 까지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민주자유화 운동의 뿌리를 잊어서는 안된다. 프라하에서 발생한 민주자유화 운동을 막기 위해 20만 명을 동원하여 침공한 소련군의 불법개입 사건으로 프라하의 봄이 좌절을 겪었지만 결국 1989년 무혈혁명인 평화적 시위의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으로 체제 전환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 박물관에서 읽을 수 있었던 역사적 평가를 뒤로 하고 체코는 지금 슬라브 민족의 정체성을 내세우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고 있다. 결국 무하가 찾고자 했던 슬라브 민족의 정체성은 새로운 시대상에 맞게 모색되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