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승 여행가

▲ 아테네 중심부 거리. 멀리 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
 그토록 그리던 그리스 땅에 들어섰다는 감격도 잠시 나는 다시 어리바리 얼뜨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야하는데 내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가야할 방향도, 타고 갈 버스 번호도, 승차권 구입하는 곳도 알지 못한다. 그 뿐인가, 그리스어도, 영어도 모르니 내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참을 이리저리 맥락 없는 배회만 하다 겨우 주위의 도움으로 표를 구해 버스에 탑승했다. 95번 버스였다. 요금은 5.5유로였던 것 같다.

아테네 상공에서 보았던 그 산들이 버스에서 봐도 역시나 돌산이다. 희끗희끗 버짐 같은 돌들이 흉해 보인다. 산은 산이로되 그리스의 산들은 울창하지도 않고 나무도 작아 삭막해 보인다는 말 외에는 달리 전할 말이 없을 정도다. 40여분 만에 고대 그리스 상업과 정치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신타그마 광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고대 그리스어로는 약속, 협정을 의미하는 신타그마는 현대 그리스인들에게는 헌법을 의미한다. 광장 맞은편에 그리스 의회가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2012년 4월 4일 오전 9시 신타그마 광장.
78세의 디미트리스 흐리스툴라스는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었다. 그는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경찰이 달려왔다.
35년간 약국을 운영해온 약사였던 그는 약국을 처분한 후 연금으로 생활했다. 2008년 국가부도 사태가 발생하자 그의 연금은 대폭 삭감 당했다.
그의 유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여기서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하겠다. 더 이상 쓰레기통을 뒤져 연명하지 않기 위해….”

아무리 민주주의를 시행하더라도 국민을 배고프게 하는 정치는 죄악이다.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아테네에서, 그것도 그리스의 상징과도 같은 신타그마 광장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지 못하는 민주주의라니 이 무슨 패러독스인가. 광장을 서성이며 잠시 국가의 역할에 대해, 정치에 대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배고픔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신타그마 광장에서 숙소인 스파르타 팀 호텔까지는 느릿느릿 20여분 걸렸던 것 같다. 거리의 분위기는 여느 유럽도시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금융위기를 겪으며 ‘유럽의 병자’로 까지 불리는 나라라고는 잘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범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신전을 팔아 빚을 갚으라.”는 비아냥을 받던 그리스 경제가 크게 좋아졌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랬던 모양이다. 숙소로 가는 길에 손에 잡힐 듯이 아크로폴리스 일부와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이곳이 아테네는 아테네구나,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중심가와 인접한 곳인데도 숙소 근처는 슬럼가였다. 중국 무역회사 간판이 달린 가게가 많아 중국인 거리 같은 분위기였다. 여러 건물 벽에는 그라피티가 뒤덮고 있었다. 길가에 주차된 승합차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어지러운 그라피티를 뒤집어쓰고 서있다. 널브러진 쓰레기들과 역겨운 지린내가 피처링을 맡았다. 10유로 안팎의 저렴한 숙소비용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일부는 호텔, 일부는 호스텔로 나누어서 운영하는 숙박업소인데 호텔방도 아마 다른 곳보다 저렴하지 않을까 싶다.

숙소 엘리베이터는 희한했다.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면 방문 같은 문을 당겨서 열어야 한다. 그 문을 열면 엘리베이터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처럼 건물에 고정된 안전문과 엘리베이터 문이 있는 게 아니라 건물에 고정된 안전문만 있고 엘리베이터 자체에는 문이 없다. 엘리베이터가 출발하자 눈앞에서 시멘트 벽면이 아래로 지나가는 광경이 낯설고 삭막하다.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다.
6인실 도미토리에 짐을 풀고 공용욕실로 간다. 카드 키를 꽂아야 불이 들어온다. 들어오는 사람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전기가 부족한 탓인 듯 했다.

방으로 돌아가자 얼굴이 갸름한 50세 가량의 남자가 인사를 한다. 스웨덴 사람 조오지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노트북으로 뭔가를 작업 중이다.
실내가 가마솥처럼 덥다. 에어컨은 꺼져 있고 선풍기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발코니로 나가 봐도 바람 한 점 없다. 그늘도 졌고 웃통을 벗어던졌는데도 살이 뜨겁다. 30도라고 해도 체감적으로는 35도 이상은 되는 느낌이었다. 리스본 시내를 다닐 때는 크게 더운 줄 몰랐는데 아테네에서는 숨 쉬기 조차 힘겨울 지경이다. 포르투갈이 얼마나 시원하고 쾌적했는지 온몸으로 느껴진다. 처음 만난 룸메이트와 어색함을 풀어 보려 “너무 덥다.”라고 하자 조오지가 기상 캐스터처럼 진지하게 대답한다.“재승 강, 이것은 자연현상이야. 자연현상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어. 날씨가 너무 덥다고 아테네 법정에 하늘을 고소한 것도 아닌데 이 무슨 뜨악한 반응이지? “조오지, 이것은 자연현상이고 나도 그것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더워.”
그의 어투를 흉내 내어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 영어로 길게 말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웃으면서 짧게 말해 주었다.“댓즈 라이트, 조오지!”

너무 더워 잠시 망설이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밖으로 나갔다. 스파게티와 치킨, 버거, 생선요리 등을 판매하는 근처 작은 식당에서 시원찮은 식사를 마치고 유적지 탐방에 나섰다. 숙소에서 내일 유적지를 안내 해줄 한국인 가이드를 섭외해 두었기에 굳이 필요 없는 과정이었으나 언제 쯤 내일이 와 줄지 기다리고만 있기엔 너무 조바심이 났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들과 신들을 만나는데 여러 사람들과 단체 미팅만 한다는 건 아무래도 마뜩찮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유적지들은 가까이 있었다. 앱으로 ‘소크라테스 감옥’을 검색해 본다. 마침 머지않은 곳에 있다. 앱이 가리키는 곳이 가까워지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영 아니다. 앱이 자꾸 버벅거리는 것도 수상하다. 자신 없는 앱이 가리키는 곳에는 고급 레스토랑이 들어앉아 있다.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들 여럿이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그들 중 몇 몇이 나를 흘금흘금 본다. 레스토랑 건물 뒤쪽으로 가는 샛길이라도 있나 해서 기웃거리면서 정장들의 눈치가 보인다. 정장한 남자들을 가까이서 보니 귀에 이니어가 끼워져 있다. 저 레스토랑에 그리스 정부의 고위 인사가 누군가와 식사 중인 모양이다. 혹시 신전 하나를 돈 많은 나라에 팔아넘기려는 자리는 아니겠지. 어쩌면 제우스신이 다른 신들을 불러 모아 저녁미팅을 가지는 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겠다 싶어 얼른 자리를 떴다. 혹시 신들의 모임을 방해한 죄로 프로메테우스처럼 코카서스 절벽에 쇠사슬로 묶이는 형벌을 받거나, 시지포스처럼 산정 높이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천형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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