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승 여행가

▲ 6명의 여사제를 기둥으로 세운 에렉테이온 신전.

   
▲ 고대 아테네 시민들의 시장이자 광장이었던 아고라.

 파르테논 신전 바로 앞에 있는 에렉테이온 신전은 신화 속에 나오는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에렉테우스와 아테나, 포세이돈 세 신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기원전 406년 완공되었으니 파르테논 신전보다 26년 뒤에 완공된 건축물이다. 웅장하고 남성적인 도리아식 기둥의 파르테논 신전과는 달리 여성적인 이오니아식 기둥이 특징적이다.

한눈에도 느껴지는 특징은 이 건축물이 비대칭적이라는 점이다. 비대칭은 불친절한 느낌을 준다. 그런 점에서 이 신전은 매우 불친절하다. 일반적이지 않은 이 불친절은 ‘왜?’ 라는 의문을 던져준다. 일부에서는 불규칙한 지형 탓이라고 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파르테논 신전의 대칭성과 통일성에 강한 대비효과를 얻기 위해서라는 추측도 한다.

옛날하고도 먼 먼 옛날 에렉테우스가 아테네를 통치하고 있을 때 포세이돈의 아들 에우몰포스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신탁에 물었다. 신탁은 딸 하나를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 딸 하나를 제물로 바치자 다른 딸들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충격과 슬픔을 안고 싸운 에렉테우스는 에우몰포스를 죽이고 그의 영토를 빼앗았다. 이에 분노한 포세이돈은 아들의 복수를 위해 그의 삼지창 트리아이나로 에렉테우스를 죽여 버렸다.

이렇게 철천지 원수지간이 된 에렉테우스와 포세이돈, 아테나가 아테네 수호신 자격을 얻고 난 후에도 끊임없이 갈등관계를 이어온 포세이돈과 아테나가 무슨 이유로 한 공간에 모셔지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신전의 구조가 비대칭적이고 불친절한 까닭은 세 신들의 관계가 불편한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이 신전의 특징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6명의 여사제들이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며 기둥 역할을 하며 서 있다는 점이다. 건축용어로 카리아티드라고 하는 이 6명의 여인상은 모두 모조품이다. 2미터 가량의 이 카리아티드 진품 중 5개는 대영박물관에 나머지 1개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국인 가이드와는 아크로폴리스 관람을 끝으로 헤어졌다. 헤어지기 직전 가장 중요한 절차가 남았다. 내일 올림포스산과 마테오레 가는 방법을 알아봐야 한다.
그가 잠시 검색한 끝에 내어놓는 답이 약간 애매하다. 가이드 역할도 그렇더니 이번에도 비슷하다. 어쩔 수 없다. 궁즉통이라고 언제나 그랬듯이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전 올림피에이온도 아크로폴리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신전 입구에 제우스 신전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당시 로마제국 황제 히드리아누스의 개선문이 서있다. 이 문을 중심으로 아테네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제우스 신전은 관람시간이 지나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특별히 아쉽지는 않았다. 축구나 야구 스타디움도 들어 앉을만한 평지는 텅 비어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저 안쪽으로 보이는 석주들뿐이었다. 그나마 철골 구조물이 얼기설기 기둥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코린트 양식의 제우스 신전은 높이 17미터의 기둥 104개로, 파르테논 신전보다 네 배가 넘는 규모였다고 한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를 기리는 신전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지금은 폐허가 돼 15개의 기둥만이 남아 있다. 신전 옛터에 내려앉는 노을빛이 발끝에 서럽다.
아크로폴리스 남서쪽 한 레스토랑 노천 테이블에 앉아 지중해식 저녁을 먹는다. 토마토와 여린 상추, 쑥갓 같은 푸성귀가 들어간 밋밋한 식사였다.
아테네가 어둠에 잠기기 시작하자 멀리 아크로폴리스가 서서히 변신하기 시작한다. 사방팔방에서 비추는 조명으로 마치 황금의 성 같다. 검은 숲 너머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황금빛으로 물든 아크로폴리스는 숨 막히는 농염미를 보여준다. 가히 신들의 공간이라 할만하다.
다음날 첫 일정으로 아고라를 찾았다. 아고라는 아테네 시민들의 광장이다. 기원전 9~7세기 아고라는 초기에 군사집결, 정치연설 등의 목적으로 이용되다가 차츰 시장으로 변모했다. 시장이라고 해도 단순한 시장은 아니었다, 아테네 시민들의 활발한 토론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들은 점심을 먹고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이곳으로 나왔을 것이다. 상인들과 손님들이 가게에서, 손님들과 손님들이 길가의 나무 그늘 아래 삼삼오오 모여앉아 민주주의를 토론하고 정치를 논했을 것이다. 소피스트들은 현란한 언변으로 상대적 진리를 역설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소피스트들에게 다가가 특유의 산파술로 소피스트들에게 집요한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시장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인간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는 일상을 살기 시작했을 것이다.
여기쯤에서 통속의 철인 디오게네스는 훤한 대낮에 램프를 밝혀 들고 “어디, 사람을 본 적 없소이까?”라며 세상 사람들을 조롱하고 다녔을 것이다.
아고라는 이렇게 대화와 소통의 광장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지금도 그리스 사람들은 저녁 먹고 거리로 나가 카페에서, 레스토랑 노천 테이블에서 이웃 간, 친구 간에 다양한 토론을 즐기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인들은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장을 보기 위해 시장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역시 고대 그리스 문화의 흔적이다.
고요한 숲에 둘러싸인 넓은 공간에는 다양한 건물들의 흔적도 보인다. 입구 쪽에는 그리 높지 않은 석축과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고 저쪽으로 아크로폴리스도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자 몸통만 남은 로마 황제 히드리아누스가 바라보고 있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온전한 형태의 건축물이 보인다.
대장장이 신 헤파이토스 신전이다. 이 신전은 가장 보존상태가 좋다고 알려진 신전이다. 사각의 두터운 돌로 된 기단 위에 육중한 도리아식 기둥들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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