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영 세종대 교수

㎓ 포르투갈 지형을 보면 거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도가 있는 언덕이 많다. 그런 지형을 따라 건물과 계단 등을 돌로 건축하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성을 쌓으려면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다 다를까 포르투갈 도시 건축에 많은 노예 노동이 들어갔다는 사실에서 급속하게 도시가 건설될 수 있는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포르투갈은 자신들이 직접 노예를 잡은 것이 아니라 중간상에게서 매매했다고 강조하지만 노예 노동의 착취를 통해 도시를 건설하고 부를 축적했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항해사 헨리(Henry the Navigator) 왕자의 후원으로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를 주도하면서 1415년 북아프리카 세우타(Ceuta)를 첫 식민지로 정복하고 아조레스제도(The Azores), 마데이라(Madeira), 카보베르데(Cabo Verde)를 식민지로 개척하였다. 이들 섬 때문에 포르투갈은 육지면적은 크지 않아도 현재 해양 면적은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다. 아프리카 해안을 항해하며 금이나 노예 등 다양한 상품을 거래하는 교역소를 설립하였는데, 리스본 주요 성당에 화려하게 남아 있는 금장식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다.
포르투갈 식민개척의 시대적 상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벨렘 타워(Tower of Belem)이다. 탐험가의 항구로 불리는 타구스(Tagus River) 강에서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통제하는 곳이 바로 벨렘 타워이기 때문이다. 방어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일환으로 1514-21년에 35미터 4층으로 건설된 육각형 요새는 당시 가장 현대적인 포병 시설로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포르투갈 7대 불가사의로 등재되었다. 이 타워는 대항해시대의 해상 및 식민지 권력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33년 외국 선박에 대한 관세가 폐지될 때까지 선박 세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시대에 따라 이 타워 지하 감옥은 정권에 대항하는 자들을 투옥시키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아담하면서도 아름답게 장식된 이 요새 1층에는 건물을 빙 돌아가면서 포대가 설치되어 있고, 2층에 사령관 실, 3층에 교회도 있고 4층으로 올라가면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좁은 계단을 통해 1명만 오갈 수 있는 정도의 넓이여서 간단하게 관람할 수 있는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적으로 촉박하지 않아야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곳이다. 제국주의 시발점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꼭 봐야 하는 역사 유적지로 항상 붐빈다. 이곳을 드나들면서 식민지에서 가져온 막대한 부 덕분에 마누엘 1세(Manuel I, 1469-1521)는 극도의 사치를 부리는 화려한 건축을 지을 수 있었는데, 이때의 화려한 건축 양식을 마누엘 양식이라고 한다.
마누엘 1세 시대에 누린 번영의 결정적인 증거물은 벨렘 타워 바로 건너편에 아주 장엄하고 거대하며 화려한 장식의 세계문화유산 제로니모스 수도원(The Jerónimos Monastery)이라 할 수 있다. 선지자와 사도들 조각상으로 건물 입구를 가득 채우고 대천사 미카엘이 많은 성도들 위로 높이 솟아 있는 화려한 장식과 조각상이 일품이다. 1501년에 기초석을 놓은 수도원은 약 100년 동안 계속 건축하여 현재의 모습이 이르고 있다. 인도 항로 발견과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24)의 원정에 대해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를 엮어 극적으로 영웅적 위업을 높이 찬양하는 애국적 대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를 썼던 민족 시인 루이스 데 카몽이스(Luís Vaz de Camões, 1524-1580) 기념비와 석관도 안치되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구성할 수 있는 데는 포르투갈의 노예 무역이 큰 축을 차지했다. 15세기에 포르투갈이 대서양 노예 무역을 시작하여 4세기 동안 지속해 온 것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잊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기억하고 후세에게 교육시키기 위해 포르투갈 노예 무역의 기원, 노예의 일상 생활, 브라질의 역할, 무역 폐지를 향한 노력 등을 살펴 볼 수 있는 노예 무역의 길이라는 관광 루트가 개발되어 있다. 12,000-14,000여명의 노예가 처참한 환경에서 포르투갈 발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확인해 보는 것은 포르투갈을 이해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벨렘 타워에서 강변을 바라보면 36년간 총리로 독재했던 살라자르(ntónio de Oliveira Salazar, 1889-1970) 시대에 과장된 국가적 자부심의 상징으로 발견의 기념비(padrao dos descobimentos)를 세워 둔 것이 있다. 50미터 높이의 기념탑은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온다. 이는 1940년 포르투갈 세계 박람회를 위한 기념비로 세운 것인데, 1960년 항해사 헨리 3세의 사망 500주년을 기념하여 오늘날의 화려한 건물로 대체되었다. 탐험가들이 새로운 곳을 점령할 때 취했던 몸짓을 연상시키는 조각상은 배가 아래서부터 비스듬하게 위로 향하게 하여 진취적인 기상을 표현하였는데, 항해사 헨리가 앞서고 마데이라 발견자인 조앙 곤칼베르 자르코(João Gonçalves Zarco, 1390-1471), 아폰소 5세(Afonso V de Avis, 1432-1481)뿐 아니라 인도 항로를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도 찾아 볼 수 있다.
리스본에서는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라는 대항해의 시작부터 식민지에서 착취한 막대한 부로 이룬 화려한 수도원 건물을 통해 과거의 영화를 살펴볼 수 있다. 포르투갈이 노예 무역에 대해 얼마나 철저하게 반성하고 성찰했는지에 대한 관심은 뒤로 한 채 과거의 영화를 기억하고 또 기념하고 싶은 욕망을 담은 발견의 기념비는 장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유적지는 근대를 착취로 출발한 상징이라는 점에서 성찰할 부분이 많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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