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논의 책

-이종암

아버지는 멋진 책을 잘 만들었다

봄과 여름 사이 오월의 논에 아버지

산골짝 물 들여와 소와 쟁기로 해마다

무논의 책 만든다

모내기 전의 무논은 밀서密書다

하늘과 땅이 마주보는 밀서 속으로

바람이 오고 구름이 일어나고

꽃향기 새소리도 피어나는 무논의 책

아버지 어머니 책 속으로 걸어가면

연둣빛 어린 모가 따라 들어간다

초록 치마를 펼쳐놓은 책 위로

하늘이 구름 불러 햇볕과 비를 앉히고

한철 또록또록 그 책 다 읽고나면

밥이 나왔다

무논의 책이 나를 키웠다

-이종암 시집 『몸꽃』(애지,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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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시 「무논의 책」은 오래 전 오월의 어느 날, 사우나‘파라다이스’를 가기위해 선린대학교 앞을 지나다가 그 길 아래 모심기를 위해 써레질 해놓은 무논을 보고서 순식간에 쓴 시다. 그 무논은 흘러가는 구름과 나뭇가지, 새들이 들어 있는 그림책이었다. 그리고 그 책 속에는 또 어린 시절 고된 농삿일로 우리를 키워주신 어머니 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위 시를 장석남 시인이 2013년 6월 21일 조선일보의 <가슴으로 읽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를 해주었다.

“모내기 전 논을 갈고 써레질을 해 놓고 논두렁을 하면(논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논 가장자리를 잘 메워 단장하는 것을 논두렁한다고 한다) 빨래한 새 옷처럼 논도 새것이 된다. 흙물이 가라앉으면 거기 하늘이 내려와 반짝인다. '구름이 일어나고 꽃향기 새소리도 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심오한 책이다. 어머니 아버지 어린아이 책 읽는 소리처럼 모를 심어나가고 그 책에 엎드려 땀 흘려 몇 번이고 읽어내면 일용할 밥이 나온다. 거기 하늘의 햇빛과 바람과 풀잎들이 적어나가는 문장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알려주는 성인의 말씀과 다름없었으리라. 책장의 책보다 훨씬 아름다운, 훨씬 실용적인, 그러나 읽기에 고된 경서(經書)가 아닐 수 없다. 지금 한창 모내기 끝난 논의 벼들이 뿌리를 내리고 생기 돋아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빼어난 문장처럼 반짝여서 삽을 어깨에 멘 할아버지 금니도 빛난다.”

1996년 겨울에 태어난 내 아들이 제 어미 뱃속에 막 들어섰을 때, 복사꽃 피던 봄날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무척 보고 싶다. 맛난 음식도 많이 못 해드리고, 좋은 곳 구경도 제대로 해드리지 못했는데, 우리 아버지, 아부지!

-이종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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