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야화]

한국 문단사에 유일하게 약관의 짧은 생애를 살아간 기형도는 시인으로 타고난 천재성을 발휘한 귀재이기도 하다.

이미 학장시절에 문학 지망생으로 습작에 전념하다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동인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 당시 노동 운동에 치중한 시들이 한창 호황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류에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고집스럽게 독창적인 자기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일로 매진함과 무관하게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그가 이윽고 하늘에 별따기 만치나 어려운 문단 등용 관문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의 자격을 획득함은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한때 기형도가 고향처럼 사랑했던 서울은 만원이 아니라 하루 아침에 폐허로 변해버린 채 거리는 온통 휴지 조각마냥 버려진 전쟁 고아들이 저마다 미군병사들이 던져주는 시레이숀 깡통을 구걸하며 외치던 헬로 소리가 백주의 허공을 메아리쳤다.

바야흐로 서울은 만원이 되면서 급기야 미혼모가 득실거리고 헐벚은 신생아들이 무질서하게 형편없이 버려진 환락의 사각지대로 돌변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정작 기형도가 아무도 몰래 선호한 이상향의 세계야 말로 눈보라가 하얗게 덮인 자정이 깊은 목노주점인 인천집일 뿐이다.

우리가 늘상 빈번하게 접근하게 되는 기형도 시세계의 휴전공간이야 말로 다름 아닌 아주 음침하기 짝이 없는 폐쇄된 미궁을 연상시켜 준다.

비교적 시인의 대표작 중에 속하는 '백야'를 주도 면밀히 살펴보면 흑백 영화의 한 장명을 방불케 해주는 삭막한 겨울 풍경이 전개되면서 대자연의 신비스러움을 실감있게 보여준다.

이러한 기형도의 시들은 생경한 현장 체험에서 아름답고 옹골차게 빚어진 정서로 인해 파생되는 결정체이기 때문에 여느 시인들과 판이하게 색다른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시인이 상시로 왕래하는 목노주점인 인천집은 비교적 생활이 빈궁한 민초들이 잠시 동안 갈증을 해소한는 소시민적인 향수를 물씬 풍겨주는 하나의 휴전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기형도의 일상적 휴전공간은 상류층의 부유한 주객들이 여가를 선용하는 매우 고급스러운 유흥가라기보다 궁핍한 일용직 노동자들이 잠시나마 여독을 푸는 변두리의 목노주점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기형도 시의 중심축을 이루는 정서의 세계는 일기 불순한 날이면 어느 중년 화가의 미완성 작품을 목격하듯 우리들로 하여금 칠흑빛 어둠이 안개마냥 자욱한 혼미 속으로 깊숙이 빠지게 한다.

여기에 버금가게 기형도 시에 등장하는 서울의 밤은 불야성을 이룬 야경으로 휘황찬란하게 반사되다가 찰나적인 순간에 돌연 흑백의 자막속을 걷고 있는 사나이로 둔갑하는데 이는 시인의 자화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어쩌면 기형도야 말로 달 밝은 가을밤에 행인들의 인기척이 끊어진 서울 변두리 외곽지대를 지향없이 거닐며 서정을 구가했던 신비주의자인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도 기형도의 문학인생에서 전개되고 있는 세상은 인간 군상들의 적자생존이 치열한 투쟁의 현장일뿐 그가 소망하는 이상향의 땅은 아닌 것이다.

소시적에 불행하게도 양친을 일찍 여윈 시인에게 두 누나는 어디까지나 유일하게 혈육으로 남은 부양 가족의 일원이었다.

기형도가 세기의 고아처럼 외롭게 나그네 행각으로 일관하는 술 마시는 도시 서울은 만원이고 그런 세상의 언저리에서 누나의 슬픔은 이율 배반적으로 발생하는데 이는 불가항력의 현상이기도 하다.

누나는 조그맣게 울었다

그리고, 꽃씨를 뿌리면서 시집갔다.

봄이가고 우리는 새벽마다 아스팔트 위에 도우도우새들이 쭈그려 않아

채송화를 싹뚝싹뚝 뜯어먹는 것을 보고 울었다.

맨홀 뚜껑은 항상 열려 있었지만

새들은 엇갈려 짚은 다리를

한번도 빠뜨리지 않았다.

여름이 가고

바람은 먼 남국 나라까지 차가운 머리카락을 갈기갈기 풀어 날렸다.

이쁜 달이 노랗게 곪은 저녁

리어카를 끌고 신작로를 걸어오시던 어머니의 그림자는

달빛을 받아 긴 띠를 발목에 메고 그날 밤 내내

몹시 허리를 앓았다.

-(달밤) 전문

이 세상에서 시인에게 누나는 친 혈육을 나눈 자매의 인연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존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동기간의 우애가 돈독하기 짝이 없는 문학적인 후견인이기도 하였다.

이 작품상에 등장하고 있는 누나야 말로 꽃씨를 뿌리고 시집간 추억일랑 그냥 남겨 놓은 채 훌쩍 떠나 버리고 어느새 도우새들이 심심찮게 채송화를 싹뚝싹뚝 뜯어먹는 계절의 아기자기한 진풍경이 선명히 드러난다.

또한 여름이 가고 바람은 남주의 무풍지대를 향해 불어오고 달 밝은 저녁에 신작로를 따라 리어카를 끌고 오시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성애가 그리운 밤의 전경이 선명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억조창생의 세월이 흘러가도 암울한 시대를 유유자족하게 풍미하며 약관의 짧은 생애를 살다간 시형도 시인은 한국 문학사에 야행성 노변정담의 경작자로 영원히 후세인들의 기억에 회자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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