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지난 주말 서울 광화문 광장은 또 다시 절규와 함성으로 뒤덮였다. 오늘은 고등학생들이 많이 나온 게 특징이었다. 내자동 네거리 부근을 둘러 보았다. 여학생들이 외치는 소리가 선명하였다. 한 고등학생은 큰 비밀 봉지를 들고 다니면서 땅에 떨어진 전단지 등을 주워 담고 있었다. 지난 토요일 집회는 노조 등 조직원들이 주도하였는데 오늘 집회는 고교생 대학생 회사원이 주류였다. 그래서인지 분노보다는 생기가 느껴졌다.

 간간히 '한일군사협정 반대'구호가 흘러나왔다. '데모당'이라는 깃발도 보였다. 좌파 단체 깃발이 더러 눈에 뜨였다. 고등학생들이 이렇게 많이 나온 집회는 처음인 것 같은데 이화여대 부정입학 사건이 기름을 부은 듯하다. 집회행렬을 향하여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도 시비를 거는 이는 없었다. 얼굴을 숨길 필요가 없는 나라가 된 것이다.

 대중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와 함께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를 갖고 있다. 광장 민주주의는 소란스럽고 거칠지만 장내정치에 영향을 끼친다. 정당이 광장을 포기하면 場內 정치에서도 동력을 잃게 된다. 오늘 새누리당은 광장을 포기하였다. '박근혜는 퇴진하라'에 동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박근혜 지지세력의 시위에도 참여하기를 꺼린다. 어정쩡한 자세가 집권당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총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은 원내 제1당이고 현직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이다. 이 당은 친박, 비박으로 분단되어 있다. 두 세력 사이엔 가치관, 역사관, 노선, 정책의 차이가 거의 없다. 오로지 박 대통령을 좋아하느냐(또는 박 대통령이 좋아하느냐)를 기준으로 갈라져 있다. 인간에 대한 호불호로 갈라 섰다는 점에서 새누리당은 전근대적 조직이거나 패거리적 속성을 지닌다.

 민주국가의 정당은 선거를 통하여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점에서 군대와 비슷한 속성을 가진다. 선거가 없던 시기엔 권력이 총구에서 나왔고 군대가 정권 창출의 母胎였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당이 여론을 조직, 선거에 임하여 정권을 쟁취한다. 선거는 정권을 놓고 다투는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다. 毛澤東은 일찍이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고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라고 규정하였다.

 정당정치에서 소속 당원은 정당에 종속된다. 국회의원이든 대통령이든 소속 정당을 무시하거나 정당을 예속시킬 순 없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예속된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새누리당 위기의 본질이다. 새누리당 개혁은 대통령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새누리당 해체론이 나온다. '해체'는 보수적 용어가 아니다. 다분히 좌파적이다. 보수는 제도와 전통을 소중히 여긴다. 위와 아래를 아는 이들이다. 죽은 사람, 살아 있는 사람, 태어날 사람을 이어주는 이들이다. '해체', '단절', '청산', '혁명'은 위 아래를 무시하는 좌익들에게 어울린다.
 保守는 補修하고 개선하여 제도와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이들이다. 공동체를 하루아침에 뒤집어엎을 수는 있으나 인간을 그런 식으로 改造할 순 없다고 믿는다. 이는 하루 하루를 새롭게 개선해가는 점진적 개혁, 즉 日新又日新의 자세이다. 문재인 씨는 나라의 근본을 확 바꾸겠다고 했는데, 새누리당은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해야 한다.

 새누리당의 현주소는 한심하지만 역사적 역할은 뚜렷하다.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이념인데, 새누리당은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가 잘한 일은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남이 욕한다고 '아 우리가 죄인이구나'라고 낙담하면 自滅뿐이다.

 박근혜-최순실 사태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은 좌파정당과는 다르다. 새누리당의 가장 큰 공적(이명박, 박근혜 정부)은 한국의 공산화를 막아온 점이다. 적어도 새누리당은 북한 핵을 비호하지 않고, 북한의 인권탄압에 침묵하지 않으며, 사드 배치에 반대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았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위기는 경제도 부패도 아니다. 간첩이나 반역자가 선거 때 유권자를 속여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어 대한민국 조종실을 차지하는 것이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런 후보의 청와대 입성을 막을 정당으로서는 현재 새누리당밖에 없다. 새누리당은 해체, 분당해야 할 정당이 아니라 내부 개혁을 통하여 재건되어야 할 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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