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태 논설주간

잠시 쉬다가 다시 일을 시작하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휴식을 취하면서 부학산을 오르고, 철길 숲을 걷다가 책 보고 싶으면 책 읽고, 글 쓰고 싶으면 글 쓰다 보니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부학산 등산코스를 한 바퀴 돌고 샤워를 하고 있는데, 선배한테서 “내일은 초파일인데 콧구멍에 바람도 넣을 겸 절에 같이 가자”고 전화가 왔다.

선배의 전화를 받고 “가진 거라고는 시간뿐인데 데려만 가주신다면 저야 당연히 오케이죠”라며 전화를 끊었다.

친형님처럼 따르는 선배였기에 기분 좋게 통화를 끝내고, 책을 보는데 다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오늘 점심 같이 먹자. 동생이 좋아하는 메뉴, 생각해서 나오너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하겠다”며 전화를 끊고, TV를 보며 기다리는데, 선배는 정오가 다 되어서 집 앞에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나오라고 했다. 집을 나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으나 마땅한 점심 메뉴가 떠오르지 않았다. 매운탕, 돈가스, 백반, 삼계탕 등을 얘기하다가 여남 바닷가에 있는 횟집에 가서 물회를 먹기로 했다. 횟집에서 물회를 시켜놓고 영일만 바다를 보면서 새삼 포항이 살기 좋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과 바다가 도시와 붙어있고, 농수산물이 흔하고, 인구 50만의 소도시여서 교통도 복잡하지 않고 걸어 다닐 숲길과 해안길이 곳곳에 있어서다. 자연산 가자미회를 맛있게 먹고,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나누고 헤어졌다.

다음날, 이른 새벽 책을 읽다가 “내 안에 빛이 있다면 스스로 빛나는 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에서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라는 알버트 슈바이츠 글을 읽고, 지인들께 “부처님오신 날, 스스로 빛나는 내 안의 빛을 발견하시길 기도합니다”라고 쓴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오전 10시, 어제 약속한 선배와 만났더니 친구 3명이 더 있었다. 한 대의 자동차로 각자가 다니는 사찰 3곳을 같이 다니면서 부처님오신 날을 축원하기로 사전에 약속한 것 같았다. 첫 번째 도착한 사찰은 동해면 야산에 자리한 성주사였다. 선배들은 대웅전에 들어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절하고 부처님의 가호와 가피 속에 세상의 즐거움을 기원했다.

나는 불자가 아니라서 사찰 주변을 둘러보고 선배들은 법당에서 축원을 하고 나와 점심 공양(산나물 비빔밥)을 같이했다. 식혜, 수박, 미역국이 맛있었다.

성주사를 나와 두 번째로 간 사찰은 흥해 초곡에 소재한 무량사였다. 오후 2시, 무량사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절에 들어서니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대웅전 앞에 무대를 만들고 4인조 밴드의 가요 연주로 신도와 주지 스님은 이미 하나가 되어 있었다. 떠들썩한 가운데 선배 일행은 법당에 들어가 축원을 하고 나왔다. 따가운 햇빛을 가리기 위해 뜰에 설치한 천막에서 떡과 식혜를 공양하고, 열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스님의 트롯 두 곡을 법문이라 생각하고 들으면서 박수를 치면서 같이 즐겼다.

그동안 법당 주변에서는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상식을 깬 부처님오신 날에 스님과 남녀 불자가 같이 어울려 노래하며 춤추며 즐기는 것을 보니 무애(無碍)라는 낱말이 떠올랐다. 불교가 오랫동안 백성과 함께할 수 있었던 근저에는 함께할수록 건강해지고 강해진다는 믿음을 나누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무량사를 나와 인근 향교산에 있는 사찰로 자리 이동을 했다. 이팝나무 군락지로 둘러싸인 임허사에서는 오랜 사찰의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선배들은 대웅전에서 부처님을 뵙고 나는 밖에서 이팝나무들을 구경했다. 임해사를 벗어난 일행은 송도해수욕장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을 나누며 좋은 인연이 오래가도록 덕담을 나누고 헤어졌다.

살아생전 법정스님은 “서로의 빈 마음을 대할 수 있는 사이, 서로의 빈 마음에 현재의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사이, 그게 좋은 친구이다”라고 했다. 삶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우리가 나눈 따뜻한 자비(慈悲)일 것이다. 부처님오신 날, 각자 다니는 사찰 3곳을 함께 동행하며 보여준 선배들의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부처님오신 날, 인연이 있어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이 오랫 동안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두고두고 기쁨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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