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모니카 수필가

야시골 서편 오래된 폐가에
귀신이 산다고 모두들 수군거린다
거뭇거뭇 해가 지면
기이한 울음소리 들려온다며 무서워한다
어릴 적 자주 놀러 간 그 집
내력 잘 아는 나는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건넌방에 옛 동무랑 오순도순 누우면
가만히 색동 이불 속 발가락 간질이던
창문 밖 쓱 긴 머리카락 드리우다 밤이면
어둑한 뒷간에 몰래 숨어
두 손 들고 히죽거리던 처녀 귀신
허나 벌써 수십 년도 지난 일
지금쯤 무정하게 늙은 그녀만 남았을 텐데
관절에 힘도 없고 머리도 허옇게 세었을 텐데
침침한 저녁 문지방 넘다 소복이 걸려
문짝과 함께 나자빠지진 않았을까
흰 고무신 두 짝 가슴에 안고
기울어진 대청마루에 중얼중얼 앉아 있진 않을까
산짐승 무서워 빈 독에 숨어 뚜껑을 닫고
한 달이 넘도록 꺼이꺼이 울고 있을지도 모르지
아, 오늘 같은 밤에 지붕 우에 앉아
아이 추워, 아이 추워, 청승맞게 칭얼대면 어쩌나
가만 생각하니 은근 걱정되는 것인데
샛바람만 불어도 덜덜거리는 무서운 적막
부뚜막 온기가 사라지고 수도도 전기도 끊기고
택배마저 오지 않는 폐가에 남아
귀신은 도대체, 저 혼자서
무얼 먹고 살아가나

<수필가가 본 시의 세상>
우리가 죽고 나면 어디에서 살까? 이 질문은 여러 가지 장르에서 다루어진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어린이들의 동화, 어른들의 야담(夜談), 학문적으로는 내세, 종교적으로는 저승이라고 한다. 육체는 사라지지만 영혼은 떠돌고 있음을 상상으로 각색된다.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내세(來世)가 있다는 것은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심오한 영향을 끼친다. 그 영향이 삶의 가치를 형성한다. 죽음에 대한 태도를 달리하게 한다.
이 시에서 ‘귀신이 산다’고 한 것은 사후의 세계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 모습으로 상상한 것이다. 귀신도 늙어갈 것이다는 상상이 재미있다. 귀신도 공포의 대상이 아닌 염려하게 하고 살가운 존재로 상상하게 하는 이 시가 정(情)스럽다. 시인의 상상에 한 수 보탠다면 이제는 귀신이 사는 집도 낡은 집이 아니라 깔끔한 집으로 이주시키면 어떨까. <박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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