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수 정경팀장/부국장

촛불과 태극기를 든 국민들만 있고,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국회 청문회니, 특검 조사니,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등으로 나라가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지만 실타래가 더 엉키듯 혼란스럽다. 혐의자들이 잘못을 실토하지 않으니, 국가 헌법기관들이 그들의 죄를 밝히느라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고 있다. 정권이 개입된 너무나도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는데도 뻔뻔한 거짓말만 무성하다.

국정농단의 장본인으로 지목된 최순실씨는 지난달 25일 특검 사무실로 향하다 느닷없이 “여기는 더 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다”라며 고함을 질러 주위를 어리둥절케 했다. 최씨가 처음 구속 당시엔 “죽을죄를 지었다”고 머리를 조아리더니, 이제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방송 카메라에 대고 민주주의 운운하는 것을 보아하니 이미 형량 계산이 끝났는가 보다.

특검의 소환에 6차례나 불응하고, 체포영장에 의해 특검에 끌려가면서 한다는 말이 “억울하다” “자백을 강요한다”고 오히려 큰소리쳤다. 최씨는 체포시한인 48시간 내내 진술거부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검찰이나 특검을 대하는 태도에서 최씨의 60년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상황에 따라 변신하는 폼이 여간 영악하지 않다.

최씨가 고함을 지르자 건물 청소 아줌마가 “염병하네”라고 일갈해 쓰라린 국민들 속을 조금이나마 풀어줬다. 그 어떤 메시지보다도 통렬했다. 이 60대 아줌마는 지난 4일 촛불집회 연단에 올라 “정말 억울한 건 난데, 그리고 우리 국민인데, 민주주의가 아니다, 억울하다고 외치는 모습을 보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 화가 났다”고 말했다.

최씨가 특검에 끌려가던 날, 박근혜 대통령은 보수성향의 한 인터넷 팟 캐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향정신성 의약품을 먹었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말은 터무니없이 없다”고 항변했다. 또 “이번 탄핵소추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 오랫동안 기획한 것”이라고 뜬금없이 ‘음모설’을 제기했다. 심지어 “최근 촛불 집회는 근거가 약하고 광우병 사태와 유사하다”느니,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법치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태극기 집회가 열리고 있다”느니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말을 쏟아냈다.

그럼 도대체 세 차례 대국민 사과는 무엇인가. 수세적 자세에서 일순간 공세적으로 전환한 대통령은 일관되게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고도 무엇이 두려운지 검찰조사, 특검조사는 피하고 있다. 더구나 헌재의 속도전에 맞서 대규모 대리인단을 꾸려 추가로 다수의 증인신청을 하는 등 최대한 시간끌기에 나섰다.

탄핵심판을 눈앞에 둔 대통령은 자기 입맛에 맞는 언론과의 인터뷰로 여론몰이를 할 게 아니라 당당하게 특검에 나가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 ‘세월호’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최순실과 무슨 일을 꾸몄는지 솔직하게 털어놓고 헌재의 심판을 기다릴 일이다. 이것이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끈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일 것이다. 법과 원칙을 강조해온 박 대통령이 헌법기관의 요구를 계속 거부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국가 수장인 대통령이 사법부와 정부기관의 공정성을 믿지 못한다면 이게 정상적인 나라인가.

최순실 사태와 박 대통령 탄핵을 지켜보면서 세상엔 참 영악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다. 국회나 특검, 헌재에 불려나온 핵심 증인이나 피의자들 거의 대부분이 “일단 부인(否認)하고 보자”며 잘도 빠져나갔다. 물론 그들 역시 억울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진술하지 않을 권리나 묵비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영악함 때문에 그들의 양심이 내팽개쳐진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들 머릿속에는 온통 법적 처벌을 모면할 궁리와 형량 계산기만 핑핑 돌아가고, 양심은 어딘가에 깊숙이 묻어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아니지 않던가. 적어도 사회에 책임을 져야할 위치에 있던 이들이다.

소위 사회지도층이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이토록 비루할 줄이야 미처 몰랐다. 그들 중 일부가 치부(致富)하려다 온 국민 앞에 치부(恥部)를 드러내는 모양이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사약(賜藥)을 받을지언정 임금 앞에서도 옳은 말을 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선비정신이 그립다. 온 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참회의 목소리가 없는, 영악함이 가득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현실이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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