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태 편집국장
베이비 붐 세대에서 이십 대까지는 IMF만을 겪은 세대이고, 십대는 IMF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세대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4.19 의거, IMF 세대와 IMF 이후 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들은 베이비 붐 세대를 행복한 세대라고, 전쟁의 고통도 모르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세대라고 말한다. 그래서 국가의 미래가 걱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그 말에 수긍이 가면서도 억울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베이비 붐 세대는 이도저도 아닌 낀 세대로서 그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어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보릿고개를 겪으면서 나름대로 힘든 시절을 보냈고, 젊어서는 경제개발에 동참하였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정치체제에서는 인권의 억압을 받으면서도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희생만 강요당했다.
그러다가 밥 먹고 살만하자, 공은 앞선 세대의 몫으로 돌아가고,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여전히 간직한 채 어물 쩡하게 자식 세대에 밀려 양쪽의 눈치만 보다가, 제 역할과 권리를 모두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모든 인생을 바치고, 권리는커녕 아무런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불쌍한 세대가 된 것이다.
국가와 가족을 위해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해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곳도 끼지 못하는 쉰 세대가 되었고, 국가에서는 숫자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사회 복지에 소외되고, 가정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외면당하고, 자식들의 눈에는 일과 돈밖에 모르는, 부패한 의식과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정신으로만 살아가는 모습으로 남았다.
국가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을 열심히 일하다 보니, 따로 자신을 계발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무능력자로 남아 세월의 뒤편으로 쓸쓸히 밀려나게 되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자신의 삶에 지휘자가 되어보지도 못하고, 끌려만 다니다가 무용(無用)한 사람이 되어 용도 폐기처분 되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또한 베이비 붐 세대는 우리 사회에서 효를 행한 마지막 세대이지만, 효를 기대할 수 없는 최초의 세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빌게이츠의 말마따나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것이니,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는 것일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회원국 중 한국만 유일하게 부모의 소득이 높을수록 자녀와 만나는 횟수가 늘어난다는 연구결과가 최근에 나온 것도 베이비 붐 세대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세상에서 가장 악성 보험은 자식”이라는 영국 속담도 있듯이 베이비 붐 세대는 자식을 위해 희생만을 하다가 결국 자식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인생은 송두리째 도둑맞은 채 삶의 무대 뒤편으로 쓸쓸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이낙연 국무총리는 한 토크쇼에서“베이비 붐 시대의 은퇴가 이제 조금씩 시작하려 한다. 그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되려면 앞으로 10년은 더 있어야 한다. 지금부터 약 10년 정도 취업의 빙하기 시대가 계속될 거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이는 베이비 붐 세대가 그만큼 살아가기 힘들다는 말로 이해된다. 하지만 편하게 안정적으로 살려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바보다.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은 출렁거리면서 때로는 위기에 부딪히며 나아가는 것이다. 삶이란 항해와 같은 것이다.
베이비 붐 세대를 위해 정부가 많은 정책을 펴고자 노력은 하겠지만, 베이비 붐 세대가 안정 지향적인 생각을 갖는 한 정부의 정책은 한계가 있다. 어쩌면 거의 제한적인 작은 부분에 효력만 나타내고 그냥 사라질지도 모른다. 나는 베이비 붐 세대에게 감히 제안한다. 우리는 그동안 열심히 살았고, 국가와 후대에게도 할 만큼 다했다.
그러니 타인의 칭찬이나 위로에 기대지 말고, 스스로 자축하며 살자고. 지금부터라도 자식들을 아름답게 놓아버리는 현명함과 동시에 가끔씩 자기에게 선물도 하면서, 자신에 대한 의미와 자아 존중감을 부여하며 순간순간 충실하게 살아왔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자고. 그래야 지금이라도 즐거움을 찾으면서, 낀 세대의 억울함과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고 자신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게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