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현 화가

파리에 도착한 첫날, 아침부터 걷기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노틀담 성당에서부터 에펠탑까지, 에펠탑에서 엘투알 개선문까지 걸어가니 저녁이 되었다. 샹젤리제 거리의 양쪽으로 수 백 미터 늘어선 나무마다 걸어둔 빨간 전구들이 켜지는걸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노틀담 성당은 철거될 뻔 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로맨스 소설을 하나 쓴다. 성당의 종지기와 한 여인의 애틋한 사랑을 담아낸 소설, ‘파리의 노틀담’ 이다. 이 소설로 성당을 살리기 위해 프랑스 국민의 대대적인 모금운동이 벌어졌고 결국 성당은 철거될 위기를 모면한다.
노틀담 성당에서 에펠탑까지 센강을 따라 걸으며 수많은 명소들을 만났다. 강 건너로 퐁피두센터, 루브르 박물관, 오랑주리 미술관, 콩고드 광장이 있고 가는 방향의 안쪽으로 소르본느 대학, 보자르 국립대학, 오르세 미술관 그리고 몇 개의 다리를 지나 에펠탑이 있다. 가까이서 보니 에펠탑의 전체모습이 오벨리스크와 많이 닮았다. 무엇보다 감명 깊었던 것은 에펠탑을 중심으로 앞뒤의 광장이 몇 킬로미터의 길이와 넓이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몇 십만 명이와도 다 수용할 수 있는 공간, 이 탁 트인 공간이 도시를 더욱 여유 있게 만든다. 우리나라로 치면 여의도에 에펠탑과 미술관, 시민광장이 있는 모양새다. 유럽은 도시의 중심과 풍광이 좋은 곳에는 광장, 박물관, 미술관과 같은 공유자산이 있고 식당과 숙박시설은 그 다음 거리에 있다. 우리나라도 도심과 주거지역의 중심에는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공유자산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
세계미술의 중심은 파리라고 한다. 이곳 파리에는 미술의 3대 중심지가 있다. 첫 번째는 6,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부터 19세기 초까지의 작품을 몇 만점 보유하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 (Musee Louvre), 두 번째로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 (Musee d'Orsay), 세 번째로는 20세기의 근·현대미술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하고 있는 ‘퐁피두 센터’ (Georges-Pompidou)이다.
프랑스가 미술 문화의 중심이 된 것은 프랑스 시민혁명의 결과이다. ‘루브르 박물관’은 처음 1190년 ‘필립 2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면서 노르만족의 침략을 대비해서 만든 요새였다. 이후 1500년대 ‘프랑수와 1세’가 증축하고 프랑스 르네상스를 이끌었는데, 이 왕이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초청했고 이때 밀라노에서 그린 ‘모나리자’가 프랑스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100년이 지나 ‘루이 14세’가 지금의 모습으로 완공했다. (말을 탄 그의 동상은 루블박물관 앞 광장에 우뚝 서 있다.)
그는 파리외곽의 사냥터가 있는 별장에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왕국을 옮긴다. (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베르사이유 조약이 1919년 이곳에서 체결된다.) 궁전을 베르사이유로 옮긴 다음, 루브르를 박물관으로 전환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된다. 1792년 ‘루이 16세’를 무너뜨린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 1793년 8월10일 ‘루브르’는 프랑스의 모든 시민들을 위한 박물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전 국민의 2%에 해당하는 소수 성직자나 귀족들을 위한 이 거대한 궁전이 98%에 해당하는 다수의 대중을 위한 박물관으로 변화, 발전되기까지는 수많은 대중의 피의 대가와 나폴레옹의 역할이 있었다.
당시 성직자와 귀족들은 국가의 재산과 땅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지만 세금은 하나도 내지 않았다. 세금은 항상 98%의 평민들에게만 과중되어 있었다. 여기서 루이16세가 세금을 더 걷으려고 하니 문제가 생겼다. 왕후 ‘마리 앙트와네트’와 도망가다 잡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며 한 말이 있다. “나의 왕국은 ‘볼테르’와 ‘루소’ 두 놈 때문에 무너졌다”(볼테르와 루소 모두 계몽주의 사상가이다.)
이후로 프랑스는 황제가 아닌 국민대표가 다스리는 국가가 되었지만 왕정을 하는 다른 나라들은 위협감을 느꼈고 그들은 프랑스에 압박을 가하여 수시로 전쟁이 발생되었다. 여기서 등장한 인물이 나폴레옹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11년이 지나 이 전쟁영웅은 프랑스의 새 황제가 된다. 당시 자코뱅당의 ‘로베스 피에르’와 친분이 깊었던, 그림 그리는 ‘로베스 피에르’라고 알려진 ‘다비드’(Louis Darid)가 나폴레옹과 함께 하면서 19세기를 여는 ‘신고전주의 미술’이 등장하고 새로운 미술형태는 급물살을 타고 변화한다. 신들과 왕들이 다스리는 시대에서 시민의 대표가 다스리는 근대민주주의의 토대가 만들어 졌고, 나폴레옹은 정복지에서 가져온 수많은 예술품을 ‘루브르’에 채웠다. ‘루브르’를 이야기 할 때 이 역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루브르’에서 소장하고 있는 몇 만점에 해당하는 작품들은 신들과 왕들, 그리고 귀족들의 이야기들과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대관식’ 등이 지역과 역사별로 전시되어 있다. 일주일 내내봐도 다 보지 못한다는 ‘루브르’를 하루 만에 평정(?)하고 중앙로비에 있는 유리 피라미드 밖으로 나오니 나폴레옹이 좋아했던 청동 말 네 마리가 이끄는 전차를 타고 광폭한 전쟁을 즐기는 신 마르스가 작은 개선문 위에서 햇빛에 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