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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층석탑
창림사지 백미는 무엇보다 남산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삼층석탑이다. 과거 울창한 숲속에 둘러싸여 있던 때와는 그 모습이 현저히 다르다. 남산 쪽에서 아래로 내려 보면 너른 들판과 푸른 하늘을 나눈 배경으로 멋스럽기 그지없다. 포석정 앞 도로변에서 남산 쪽으로 탑을 대비시켜 바라보면 그 자태는 참으로 고고하다. 과거 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삼층석탑이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남산에 신비감을 더한 것 같다. 탑 상륜부는 훼손됐지만 높이가 약 7m나 돼 남산 주변에서는 보기 드물게 큰 탑이다. 아래 여덟 개 사각형 기단부에 팔부신중 4개, 일층 탑신부에는 여닫이문과 부처가 드나드는 문고리가 쌍으로 양각돼 있다. 기단은 축조 당시 각 면 2개로 사방 모두 여덟 조각으로 이뤄져 있다. 이에 따라 팔부신중 조각도 본래 8개가 있었을 것으로 추축되지만 지금 4개는 없다. 팔부신중은 부처가 설법할 때 항상 따라다니며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8종류의 신장상(神將像)을 말한다. 삼층석탑에는 기단 서면 천과 가루라, 남면 아수라, 북면 마후라가가 남아 있다. 두드러진 팔 근육과 흩날리는 옷자락이 매우 생동적이고 양질감이 돋보인다. 현재 경주박물관에는 이곳에서 수습된 긴나라, 가루라, 야차상이 있다고 하지만 현재 삼층석탑의 팔부신중보다 크기가 작아 바로 옆 터만 밝혀진 다른 석탑 기단부의 조각으로 추정된다.
◇건립 배경
삼층석탑은 조선 순조 24년(1824년) 도괴로 사리봉안장치에서 금동판에 새겨진 무구정탑원기(無垢淨塔願記)가 발견돼 신라 문성왕17년(855년) 건립된 탑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무구정탑원기는 이후 사라졌고 금석학자 추사 김정희(1786~1856)가 현장에서 보고 적은 모사본만 전해졌다. 조성연대 또한 모사본을 통해 알려졌다. 그런데 사라진 무구정탑원기가 지난해 2월 문화재청의 사찰문화재 일제조사도중 이천 용주사 효행박물관에서 발견됐다. 제작연대와 발원자의 이름이 적힌 완벽한 통일신라시대 금석문이었다. 세로 22.4cm×가로 38.2cm 금동판의 앞뒷면에 건립 배경과 발원, 조탑(造塔) 기술자 등 기록된 내용은 모사본과 일치했다. 불교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탑원기’는 1968년 용주사의 말사인 이천 영원사에서 대웅전 해체중 기단에서 출토돼 사찰에서 보관해오다 2011년 효행박물관에 기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층석탑 바로 옆에는 또 다른 탑이 자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탑 초석자리와 함께 탑신과 지붕돌 조
각이 발견됐다.
◇쌍귀부
석탑 서편 아래 들판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는 마치 움츠린 자세로 기어가는 거북 두 마리가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좌대위에 앉아있다. 비신을 얹는 쌍귀부(雙龜趺)다. 너비 86.3cm 길이 142.5cm 높이 38.5cm 규모다. 등위 비신과 두 마리 모두 머리 부위는 사라지고 없다. 한 마리는 머리 부분만 경주박물관에 있다. 그러나 거북 껍질 육각형 무늬는 등 부분은 확인이 어렵지만 몸체 아래 다리 옆은 윤곽이 뚜렷하다. 두 마리 모두 앞쪽 두 발은 엉금엉금 기어가듯 어긋난 모양이지만 왼쪽 거북은 왼발이 뒤로 젖혀져 물을 젓는 모양새다. 앞쪽으로 나온 굵은 발톱은 당대의 힘찬 기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쌍귀부에는 당대 명필인 김생(711~791)이 쓴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세운 흔적만 있을 뿐 찾을 길이 없다. 앞머리 위치 또한 남동쪽이지만 조성 초기 놓였던 자리인지 확인할 길 없다.
◇차문화의 흔적
창림사지에는 오늘 날 우리나라 차 문화가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됐다는 흔적이 나왔다. 이곳에 수습된 기와조각 겉면에 ‘다연원’(茶淵院)이라고 새겨진 한문이 발견된 것이다. 이 기와조각은 고려시대의 기록에 나오는 '다원'(茶院), '다정원'(茶井院), '다방원'(茶方院) 등의 차 제조 또는 판매 시설이 이미 신라 때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