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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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미 아이국악협회 포항지부장
나는 악기를 좋아한다.
솔직하고, 진실하고, 정겹고, 흥겹고, 믿음직하고, 열정적이고, 속이 확 풀린다. 이런 식의 찬사는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을 만큼 악기가 좋다. 여러 악기 중에서도 타악기인 북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장구를 빼놓을 수 없다. 오랜 시간 함께 내 손에서 친구가 되어준 장구, 참 고맙고 대견하기도 하다.
“집에 장구가 있는데 그냥 두면 악기 상하니 국석 엄마가 한번 배워보지?”
20여 년 전 처음 장구를 만나게 해준 그 분, 그것이 계기가 되어 20년째 장구채를 잡고 있다. 이상하게도 그 분 이름이 떠오르질 않지만 꼭 감사를 드리고 싶고 장구도 가르쳐 드리고 싶다.
처음 장구를 배우러 간 곳은 해병군인이 관리하는 건물인데 장구 선생님이 한 장단을 치면 바로 그 장단을 이어 받아 치며 배워나갔다. 내가 젊어서 그랬는지 선생님은 여태 가르친 사람 중에서 가장 빨리 잘 친다고 칭찬해 주었다.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장구채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 했다. 병설교사 시절 연수 교육 중 2시간 동안 장구를 쳐본 것이 전부였는데 정말 신이 났다.
사실 나는 어릴 적부터 장구를 치고 싶었다. 우리 집이 종갓집인 탓에 보름날마다 매구칠 때 장구를 치는 모습을 보며 컸다. 청마루 끝에 항상 얌전히 놓여있던 장구는 나의 일급 관심 대상이었다. 그러나 장구 곁에 가기만 하면 할아버지의 담뱃대가 먼저 쫓아왔다. ‘기집아가 기생될라 카나’ 해방 때 일본에서 나오신 할아버지의 엄포였다.
덕분에 장구 곁에는 얼씬도 못 했지만 마을행사나 보름날 매구치는 날은 풍물패의 꽹과리 소리에 방에 앉아있질 못했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이 흥분되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할아버지가 무서워 오래 쳐다보지도 못 하고 몰래 뒷담 밑에서 혼자 흔들거리는 어깨를 누르며 그저 멀리서 울리는 풍물소리에 만족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그지없다. 그때가 초등학교 저학년쯤 이었을 것이다. 어찌나 그 소리가 신이 났던지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렇게 좋던 그 소리에 나이 서른이 다 되어서야 장구채를 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 장구 소리에 끝없이 빨려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있어 주부팀에서 저녁에 남성 혼합팀으로 자리를 옮겨 매일 장구를 치고 또 쳤다. 장구 귀신이 붙었다고 남편이 아파트 문에 자전거를 집어 던질 때까지 나는 그렇게 장구를 남편보다 더 좋아했다. 하나 뿐인 아들을 혼자 내버려 둔 채…….
여기서 잠깐 내가 좋아하는 장구이야기를 제대로 하자면,
서양음악에 피아노와 같이 기본적이면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우리의 악기를 들라면 '장구'라고 주저 없이 내세울 수 있다. 장구는 우리음악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민속악뿐만 아니라 궁중음악과 불교음악에도 어김없이 쓰인다. 그뿐만 아니라 춤과 민속놀이에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장구 하나만 있으면 못해 낼 짓거리나 놀이가 없을 정도다.
장단만 짚어 주는 타악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기본적이고 중심적이면서도 광범위하게 쓰이는 장구의 용도와 기능이 대단하다.
장구라는 타악기는 한 가지 성질의 소리만을 내는 여타의 타악기와는 달리 두 가지 소리를 동시에 낼 수 있는 악기라는 특색을 갖는다. 그 두 가지의 소리는 바로 여자소리(陰聲)와 남자소리(陽聲)이며 장구는 이를 확실하게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자와 남자가 잘 만나 '하나'(合장단)가 되면 생명이 탄생된다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남자소리를 내야 하는 채편 쪽은 강하고 높은 소리를 위해 막대기(채)를 쓰고, 북편 쪽은 같은 가죽성질인 사람 손바닥을 그대로 쓰거나 채를 쓰더라도 부드러운 소리를 위해 궁굴채를 쓴다.
최고의 여자소리와 최고의 남자소리가 만나서 일체가 되는 절정의 순간에 나오는 울림의 소리는 무아경의 소리이며 황홀경의 소리이며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극치의 소리이기에 장구의 "덩"소리는 우주만물이 생성되는 그 태초의 소리이다. '장구'라는 명칭은 "노루獐"자, "개狗"자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황송통(黃松, 혹은 벽오동통)에다 노루가죽과 개가죽을 양쪽에 맨 장구가 최고의 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일면 설득력을 갖기도 한다. 이렇게 만든 장구를 달밤에 치면 그 소리가 30리나 간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그러나 지금은 노루가죽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개 가죽으로 맨 장구를 최고로 치고 있다.
장구에 얽힌 이야기를 어찌 한 번에 다 할 수 있을까, 나에게 있어 장구는 삶에 숨구멍이자 호흡이며 인생의 터닝 포인트이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많이 왔다. 장구를 배우러 갈 때마다 이사람 저사람 차를 얻어 타고 다녔는데 그날은 아무도 가지 못한다고 하여 혼자 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남편은 출장 중이어서 차는 주차장에 있었지만 겁이 많아 차를 몰고 나갈 수가 없었다. 면허증은 학원도 등록하지 않고 쉽사리 따고는 무서워서 운전을 못 하고 있었다.
덩치만 컸지 간이 콩알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때는 도로주행이 필수가 아니어서 운전면허증이 있어도 실제 도로 주행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상태였다. 장구는 치러 가야하는데 비는 쏟아지고 악기를 들고 택시를 타자니 불편하고……. 그때는 장구가 너무 치고 싶었던 터라 갑자기 용기가 불쑥 생겨 장구를 싣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저녁 퇴근시간이어서 도로는 차들로 가득했다.
연일대교 위에서 중앙선을 휙 넘었지만 다행히 사고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그때 일이 너무도 생생하다. 만약 사고가 났다면 아직까지도 운전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운전하면서 터널을 지날 때면 가슴이 답답하고 핏줄이 쪼그라드는 것 같아 가끔은 운전을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처음 운전을 할 때 그 기분이다. 자유 계약직인 나에게 운전은 필수인데, 어쨌든 장구 덕분에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 밤이 하얗게 다 새어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