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의 미모와 마음씨에 몽룡은 아껴두었던 마음조차 다 빼앗겨버렸어. 가볍게 만났다 헤어지려 했던 얕은 생각이, 시간이 조금씩 지날수록 지금 마시는 술이 독약이라도 억울할 것 같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춘향이 좋아졌어. 한 마디로 뿅 간 거지. 한 잔이 두잔 되고 두 잔이 세잔 되자 몸에서 열이 나고 판단력은 흐물흐물 흐려지고 기분이 좋아졌어. 술맛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지. 더구나 다정한 남원 미인이 따라주는 술이 그냥 술맛 뿐일까?
“춘향아, 어찌 이리도 아름다우냐? 선녀도 너보다는 못 하리라.”
춘향에게 푹 빠진 몽룡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월매가 나섰어.
“안 되겠소. 도련님이 춘향이 서방도 아닌데 누가 보면 오해하겠소. 그만 퍼뜩 일어나서 돌아가소. 이러다가 내 딸 앞길 막겠소.”
월매의 언성이 높아지자 취기가 오른 몽룡은 겁대가리가 상실되었지.
“좋아, 좋다고. 까짓 것 나중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 당장 백년가약을 약속하지. 백년가약을 맺으면 자네 마음이 풀리겠는가?”
술에 취한 몽룡은 춘향이와 헤어지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혼인하겠다고 약속했어. 부모님이 아시면 신분 차별이 분명한 이 나라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지만, 미모가 뛰어난 춘향을 놓치기 싫었어.

“참말이오? 지금 임시방편으로 백년가약을 맺고 나중에 그런 일 없다며 오리발 내밀면 우리만 손해니 그런 말씀 마오소서.”
월매는 산전수전 다 겪은 경험으로 몽룡의 마음을 슬쩍 떠봤어.
“이보게, 속아만 살았는가. 남아일언중천금일세. 양반의 자식이 한 입으로 두말하겠는가. 믿어주게.”
몽룡은 자신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약속은 꼭 지킨다고 자신있게 말했어.
“어려서부터 금이야 옥이야 고이 길러 양반집 처자 못지않게 글공부 시키고 예의범절 가르쳐 누가 봐도 품위 있고 아름다운 아이지만, 도련님은 귀한 양반 아들이고 우리 아이는 천한 신분이라고 나중에 괄시하며 모른 체하면 내 아이는 어찌 되오?”
월매는 술에 취한 몽룡에게 다짐을 받고 싶었어. 누구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으니까.
“사내가 한 번 약속하면 백년은 가니 그런 일 없소.”
술기운에 시작한 맹세를 되돌릴 수 없게 되자 마음에도 없는 말을 쉽게 했어.

“그렇다면 그 마음을 여기에 증서로 써 주소.”
월매가 벼락같이 지필묵을 앞에 내놓았어.
“서약서 말인가? 뭐라고 적으면 되는가.”
마음속은 불에 덴 것처럼 뜨끔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했어.
“소인이 부르는 대로 적으소. 나 이몽룡은 성춘향을 아내로 맞이하는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백년가약을 맺는다. 다 적었소?”
이몽룡은 술기운에 월매가 불러주는 대로 단박에 쓰고는 사인까지 딱 해 버렸어.
“다 적었네. 여기 이름까지 적었으니 이제 만족하는가.”
월매는 몽룡이 나중에 딴소리를 할까봐 채 마르지도 않은 서약서를 냅다 뺏어서 손에 쥐고는
“두 사람의 혼인이 성립되었으니 오늘이 첫날밤이오. 좋은 꿈꾸시고 편히 쉬시오.”하고 입가에 함박 웃음을 지으며 총총히 밖으로 나갔어.
춘향은 앞뒤 생각도 없이 막무가내로 구애를 하는 철없는 몽룡이 맘에 들었어. 이만하면 용모도 준수하고 게다가 양반 아들이란 게 썩 마음에 들었어. 혼인한다는 증서도 받아두었으니 이제 자신은 양반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어.
이제 기생 딸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자 몽룡이 고맙게 생각되었지.

첫날밤,
괜시리 가슴 설레게 하는 밤.
술기운을 빌어 나중에 다가올 일들은 다 잊고 싶은 밤.
강제성이 조금 섞였지만 흡족한 거래가 성립된 밤.
젊고 뜨거운 피가 펄펄 끓는 단옷날 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사랑하기 좋은 밤.
아무도 흉보지 않는 그런 그림자 같은 밤.
몽룡과 춘향이 좋아서 죽을 것 같은 기분 좋은 밤.
그냥, 그런 좋은 밤이었어.

“어디 보자. 이제부터 자세히 요리보고 조리 봐도 흉 되지 않겠지. 어쩌면 이리도 고우냐. 촛불 속에 은은하게 비치는 발그레한 얼굴은 언제부터 이토록 예뻤냐. 내 너를 못 만나고 살았으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손은 보드랍고, 손가락은 가늘고, 손목도 아담하게 쏙 들어오고. 어디 한 군데 미운 곳이 없구나. 발바닥도 어디 보자. 어디 어디 자세히 보자. 에고고, 작기도 해라. 내 손보다 작구나. 작고 아담해서 두 손안에 쏙 들어오는구나. 이 작고 보드라운 발은 직녀가 짰다는 천의보다 더 곱구나.”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