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학 서라벌군사연구소장

신라인의 해상활동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의 장보고'와 일본승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838~847)' 정도의 문헌 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신라 말기에 치중되어 있지요. 신라인들이 당의 신라방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활동 그리고 장보고의 국제무역 및 해상왕국海上王國을 건설할 수 있었던 여건은 어디서 유래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별로 밝혀지지 않았소.
5세기 중엽에 신라는 이미 왜倭에 조선술을 가르쳐 주었는데, 왜에 구조선(構造船)이 출현한 것은 신라 조선기술의 도입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오.
진평왕 5년(583) 병부 속에 선부서(船府署)를 두고 선박을 관장케 했다고 했소.
7세기 중엽, 왜인들은 왜선(倭船)을 타고 서해를 건너 당나라로 왕래한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정도로 위험하여 신라선(新羅船)을 무척 선호했지요.
예컨대 657년 왜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왜승(倭僧)들로 하여금 신라의 사신에 딸려서 당나라에 데려가도록 부탁했으나 신라가 거절하자 왜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다음 해 신라의 승인을 얻어 신라선으로 당나라에 유학했다고 했소. 더욱이 839년 일본의 견당사선(遣唐使船)에는 신라인 항해사가 60명이나 고용되어 한 배에 6명 내지 7명이 탑승하고 있었고, 이들 배가 당나라 해안에서 난파당하자 사신들은 귀국 때 신라선을 이용했으며, 엔닌(圓仁)도 귀국(847) 때는 아예 신라선을 이용해서 귀국했소.
이처럼 신라인들의 해상활동과 이를 뒷받침하는 조선술과 항해술 등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요? 663년 백강해전(白江海戰)에서 왜 수군은 당 수군에 의해 참패를 당하였고, 676년 기벌포해전에서 신라 수군은 당 수군을 격멸 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이것은 고려 중엽까지 계속되었소.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수한 2년 후인 678년 정월에 선부령(船府令)을 한 사람 두어 선박의 사무를 관장케 했는데, 이 중요하고 혁신적인 내용을 역사가들은 간과해 왔던 것이오. 지금까지 병부(兵部) 속에 예속되었던 것을 병부와 동격인 선부를 두었다는 것은 당이나 일본에도 없는 신라만의 독창적인 제도였지요.
문무왕은 선부를 창설하여 해양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기초를 마련했으며, 장보고의 해상활동의 기반도 여기서 비롯되었소. 문무왕이 죽은 후에 나라를 지키는 대룡(大龍)이 되겠다고 한 것은 해상세력의 확보를 통해 나라의 안전과 발전을 누리게 하겠다는 뜻이며,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케 한 것은 위정자와 국민들로 하여금 바다의 활용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하오.
19세기 말, 미국의 마한(Mahan, 1840~1914) 제독(提督)은 해양세력(sea power)이란 강력한 해군, 생산과 통상, 해운 그리고 식민지의 총칭이라 했는데 신라는 이 모든 구비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요. 즉 제해권의 장악, 견직물·금은동으로 만든 공예품, 무기 등의 생산 능력, 항해술 그리고 당나라에 자치권을 가진 신라방을 갖추고 있었으니까요.
신라의 찬란한 민족문화는 삼국통일·해상세력의 확보와 국제무역에 의한 부의 축적 그리고 전통사상을 발전시킨 세속오계(世俗五戒), 즉 화랑도를 바탕으로 외래사상(外來思想:유교 불교 도교)을 수렴함으로써 활짝 꽃피웠던 것이지요.
박 형, 오늘은 이만 줄이며, 형의 건승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