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숙 작가

 변학도는 검소하게 살아온 것이 몸에 배어서 사치를 모르고 살았어. 남원 부사가 된 후에도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지 않고 부인에게 보냈어. 세상 물정을 한눈에 꿰뚫어 보는 여장부인 아내가 남편 대신 대감댁에 주기적으로 뇌물을 상납했어. 친분을 유지하는 데는 선물이 최고거든. 아무리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라도 수입 명품이나 고가 비단옷이나 명품 보석을 주면 사촌보다 더 가깝게 지내고 정도 반쪽 나누게 돼. 이게 세상 인심인 거야. 변학도 부인은 야심이 컸어. 상권을 쥐고 돈을 모으게 되자 대감댁 안방마님이 되고 싶었어. 남동생이 관리하는 염전에도 투자를 하여 망선을 다섯 척이나 구비해 두었지. 상도에 뛰어난 책사를 여러 명 두고, 외국어에 능통한 통역관도 여러 명 둘 만큼 부의 규모가 점점 커져 외국에 나가 장사하는 상선도 두 척이나 있을 만큼 큰 기업으로 성장했어. 날이 갈수록 장사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 것은 사람들을 잘 다룰 줄 알았기 때문이야.

육방에게도 귀가 있기에 고을 백성들이 사또를 욕하는 것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자신들도 이미 한 배를 탄 처지라 양심에 찔리지만 사또의 충실한 앞잡이 노릇을 했어. “변 사또가 오기 전에는 꿈도 희망도 없이, 그저 밥이나 먹고 하루하루 아무 재미도 없이 살려는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라고 출세하지 말라는 법 있어? 욕 좀 얻어먹으면 어때. 얼마든지 하라고 해. 내 자식이 잘되면 그만이지. 자식이 서당에도 다니고 음악도 배우고 좋은 옷에 좋은 음식 먹어 점점 유식해지고 의젓해지는 것을 보면 대견스러워. 돈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도 느끼겠더라고. 윗물이 이미 다 썩었는데 아랫물도 좀 썩으면 어때서” 돈의 맛을 좀 본 거야. 맛만 봤을까?

어느 날 변학도가 자신의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며 흐뭇해하다가 갑자기 인생의 재미가 돈밖에 없었다는 게 아쉬웠어. 왠지 뭔가 좀 억울하고 서운하고 손해 본 듯한 그런 느낌. 가난할 때는 따뜻한 밥과 뜨끈뜨끈한 방이 최고였지만, 이제는 벼슬도 있고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돈이 있어서인지 가슴 한 견이 서늘하고 허전했어. 뭐지? 뭘까?

“마음이 허전한 이유가 뭘까? 꽃밭에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이유는 꽃의 싱그러운 그 젊음이 부러워서이지. 청춘이 아름다운 것도 모른 채 꽃이 아름다운 것도 모른 채 지내 와서 바람은 억울했던 거야. 내가 바로 그 바람 같아. 돈 버는데 청춘을 보낸 게 돌아보니 좀 억울해. 사람이 사는 맛은 돈과 술과 여자라 했거늘, 돈맛과 술맛은 알겠는데 여자 맛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구나. 아내와 떨어져 지낸 시간이 어느덧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뀌었으니 속절없이 몸이 늙어가는 것인가?” 변학도가 혼잣말로 넋두리를 하는데 이방이 그 말을 들었어. 귀도 밝아라.

“남원에는 미인이 많이 있지요.”
“미인?”
“예로부터 남원은 예술의 본거지라 미인들이 많습니다만 그중에 최고 미인은 춘향입니다. 하지만 그림의 떡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기생 딸인데 지난번 사또의 자제분과 혼인 약속을 했지요. 과거에 급제하면 데리러 온다며 언약하고 떠났는데 아직 소식조차 없다고 합니다.”
“지금은 혼자렷다?”
“소문에는 수절하며 도련님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런, 이런. 어떤 양반이 기생의 딸을 아내로 삼는단 말이오? 한낮의 단잠일 뿐이오. 그 말을 한 도령도 못 믿을 인간이지만, 그 말 믿고 기다리는 춘향이도 어리석도다. 그런 미인이 있다면 한 번 보고 싶소.”
목석같은 변학도가 관기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춘향에게 관심을 보였어.

그는 춘향의 집에 좋은 선물을 보내기로 했어. 뇌물을 하도 많이 줘본 버릇이 있는지라 환심을 사려면 뇌물을 먼저 먹여놔야 마음이 움직인다고 생각했거든. 뇌물과 마음을 거래하는 것보다 쉬운 건 없으니까.
“하이고, 이게 다 뭣이다요?”
월매는 처음 받아본 선물에 눈이 휘둥그레졌어.
“사또께서 보내신 선물일세.”
이방의 말에 눈치 구단인 월매가 생각이 멈췄어.
“소인에게 어쩐 일로 선물을 보내요?”
“어째 자네에게 보내는 선물이겠는가. 춘향이 때문에 보내는 것이제.”
그제야 눈치챈 월매가 짐짓 모르는 척 거만한 자세를 취했어.
“우리 아가한테 뭔 볼일이 있다요?”
“고것을 몰라서 묻는가? 춘향이가 이쁘다는 소식을 듣고 보내는 것이지.”
이방의 말에 월매는 속으로는 좋으면서 호들갑을 떨었어.
“이게 뭔 일이래? 우리 아가는 이미 약속한 이 도령이 있는디. 나중에 알게 되믄 뼈도 못 추릴 것이지라. 일 없응께 갖고 가소.”
선물을 슬쩍 앞으로 밀면서도 눈은 미련이 남아서 선물을 쳐다보았어.
“변 사또께서 다 알고 계시네. 이 도령이 소식 없는 것도. 이것은 변 사또 마음이니까 받아두게. 귀한 것이라고 하니까 나중에 춘향이한테 고맙다는 인사나 하라고 해 주게.”

이방이 눈짓하며 선물 보자기를 풀어보길 재촉했어.
“이건 굴비 아닌감? 이건 또 뭐여. 고기 아니여? 이런 귀한 음식을 혼자 먹으믄 목구멍에 탁 걸리제. 이방 어르신 좀 가져가소. 나는 살 떨려서 다 못 먹겠소.”
산전수전 다 겪은 월매가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서 굴비와 고기를 반이나 들어냈어.
“그려. 뭐든 나눠 먹는 인심이 넉넉해야 훗날 도와줄 일도 생기지. 월매, 우리 서로 자주 봄세.”
월매는 선물이란 것을 처음 받아보게 되자 마음이 조금 흔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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