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진 문학(사학)박사

사야가는 울산의병진에 가담하여 조총을 만들고 화약을 제조하여 軍器를 보급하는 한편 적을 공격하여 한 달 동안 7~8회의 전투를 치르며 연전연승하였다. 이 당시 사야가의 무기가 매우 정예하였으므로 항상 선봉에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정예한 기계란 사야가 부대가 보유한 조총과 화포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조선군에게 무기가 충실해졌고 이 무렵 사야가는 조선군을 위하여 조총 제조기술과 화약제조법을 전수하면서 경상하도 각 군현의 관-의병 연합군과 합진하여 신식무기인 조총을 앞세워 선봉에서 적과의 전투를 이어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모하당문집' 권2, '연보' 만력 20년 임진)

국왕 선조 또한 사야가를 직접 면접하고 무예를 시험해 본 후에 일본군의 조총의 우월성을 인식하고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번번이 승리하는 것은 조총과 화포 때문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사야가를 통해 조선군에게도 조총 제조기술을 습득케 할 수 있도록 장려하면서 비변사로 하여금 포수를 양성할 것을 강조하였고 무과의 시험과목에 조총 사격술을 포함시키도록 한 바도 있었다.

임진년 10월에는 적선 6척이 기장으로부터 올라오고 있었고, 육지의 적은 아이포(양산 기장의 포구)로부터 울산으로 들어왔다. 사야가는 김태허, 전응충, 박홍춘, 서인충과 함께 힘을 합해 육지의 적 30급을 베고 적선 2척에 타고 있던 일본군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전공은 순찰사 한효순과 병사 박진의 장계로 조정에 알려졌다. 조정에서는 울산가군수 김태허를 실군수로 임명하는 한편, 사야가를 조정에 불러올려 그의 무예를 시험한 다음 가선대부에 제수하고 조선의 성과 이름을 하사하고 조복과 청포 3,000필을 하사하였다. 이처럼 선조로부터 ‘사성 김해김씨’와 이름 ‘충선’을 내려 받고 조선인 김충선이 되었다.

이후 김충선은 조선군에게 신식 무기인 조총을 보급하는데 일조함으로써 조선군의 무기체계를 강화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군의 정세탐지에도 일조를 하였다. 일본군 제2군의 선봉장으로 휘하에 3000여 명을 거느린 고급 장수였으므로 일본군의 군사기밀과 작전 및 전술·전략의 핵심 내용을 자세하게 지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무렵 그는 경상좌병사에게 글을 올려 조선의 병기가 일본군의 무기에 비하여 열악하니 하루 빨리 조총과 화포 및 화약제조법을 전수하여 정예무기를 갖출 것을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소장이 귀화한 이후에 우리나라(조선)의 병기를 살펴보니 비록 칼과 창, 도끼와 활이 있기는 하나 직접 전투에 나가서는 쓸 만한 무기가 거의 없으니 개탄할 일입니다.… 일본의 병기는 조선과 달리 첫째는 화포, 둘째는 조총인데 둘 다 무기로서는 가장 훌륭한 것이어서 쏘면 맞지 않는 일이 없고, 맞으면 죽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다 한들 당해낼 수 없고, 아무리 전략이 우수할 지라도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니 활과 칼로서는 대항할 수 없는 기묘한 무기입니다. 소장이 화포와 조총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니 이 기술을 조선 군중(軍中)에 널리 가르쳐서 전투에 사용한다면 어떤 싸움에라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 지금 이 조총이 이 나라에 보급만 된다면 적국의 외환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오직 원하오니 하루 속히 소장의 청을 들으셔서 염초를 구워 화약을 만들고, 조총 수만 자루를 우선 만들어서 전투에 쓰기로 하고 각 읍·진과 군사 주둔지마다 총 쏘는 기술을 가르쳐서 최신의 정예무기를 가지게 하는 것이 가장 다행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모하당문집' 권1, 서, 상절도사서)

적의 선봉장에서 조선으로 귀화한 김충선이 보기에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과 조선군의 군사력 면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조선군의 무기체계의 열악함과 전술의 부실함이었다. 무기가 부실하면 아군 병력을 적에게 가져다 바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충심을 다해 조선 조정 및 관리들에게 당시 일본군이 갖춘 최신 무기인 조총을 갖출 것을 제안하였다. 그 방법은 조총과 화약 제조술을 가진 자신의 휘하 장수들을 조선의 각 진중에 보내어 조총을 자체 제작하게 하는 일이었다. 즉 조총의 국산화를 이루는 일이었다. 이때 훈련도감 및 각 진중에 파견된 조총 전문제작인으로는 그의 부장이었던 김계충과 김계수가 있었다.

김충선이 임진왜란 초기의 조총의 국내 제작에 기여한 바는 매우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여러 대신과 장수들을 상대로 조총제작법과 화약 제조법을 전수하였으며 각 지역의 의병 및 관군과 합세하여 직접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때 김충선의 도움을 받은 인물로는 울산군수 김태허, 경상감사 김수, 경주부윤 박의장, 순찰사 이덕형, 호남의병장 김덕령, 의령 의병장 곽재우, 전라감사 정철, 수군통제사 이순신,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 등 수십 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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