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승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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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 상공에서 바라본 아테네 일부. | ||
“여기로 가.”
메모지에는 109. 110, 111 숫자가 적혀 있다. 탑승 게이트인 것 같다. 이 와중에 이런 친절까지…. 역시 사람은 어리바리 해야 하나보다. 그래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아마 기사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 녀석은 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울어버릴지도 몰라.’
뭐, 그래도 내가 한국인이라고 밝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전 국민이 끌어 올려놓은 국격을 깎아내릴 일은 없었다.
“무토 오브리가도!(엄청 고마워!)”
나의 인사에 기사가 손을 흔들어 주며 사라져 간다. 멀어지는 택시 뒷모습을 보며 팁을 줄걸, 가벼운 후회가 들었지만 버스는, 아니, 택시는 이미 떠났다. 리스본에서 한국인 가이드에게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변명 같지만 얇은 지갑 탓만은 아니었다. 평소 팁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보니
평소 팁은 자기과시용으로 악용하는 사람들도 많고, 고용인으로 하여금 임금을 적게 주게 하는 부작용도 있어 별로 탐탁찮게 생각하던 습관이 작동한 탓이었다. 이렇게 꼭 줄만한 상황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답례를 해야 했는데 아쉽다. 그나마 스페인도 특별히 팁 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아니라 다행이다.
탑승 게이트를 찾아 달렸다. 만약 탑승에 실패하면 많은 것이 틀어져 버린다. 택시 기사 팁도 주지 못하는 처지에 아테네행 티켓을 다시 구입해야하는 상황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아테네 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다. 출국 보안검색대 게이트를 통과하던 배낭이 문제였다. 요원 하나가 배낭을 열어 짐을 다 꺼내란다. 풀어 놓았던 허리띠 차랴, 컨베이어 타고 가는 소지품 챙기랴 정신 사나운데 배낭 속 짐까지 다 풀어놓으라니, 아이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아까 대기 중에는 공항 매점에서 구입해서 포장도 뜯지 않은 스낵도 버리라고 해서 버렸는데 이번엔 스킨로션을 압수해 버린다.
쏟아 내었던 물건들을 쓸어 담고 간신히 비행기에 탑승해 앉으니 진이 다 빠져버린 느낌이다. 그래도 리스본에서 출발해 15시간 만에 무사히 아테네행 비행기에 탑승한 것만 해도 대단한 업적이다.
문득 고마운 얼굴들이 스쳐간다. 마드리드행 버스가 운행하는 버스 터미널을 검색해서 알려 준 스페인 교민 최진석 선생, 버스 터미널 앱에 들어가 버스표를 예매해 준 리스본의 한국인 가이드, 한심한 여행자를 태워 극적으로 탑승에 성공하게 해 준 택시 기사까지 세 조력자가 없었더라면 이번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그시 눈을 감고 세 조력자들에게 나를 대신해서 하늘이 답례해 주기를 축원하고 있는데 승무원이 황급한 표정으로 뭔가를 물어온다.
평화를 방해하는 승무원이 조금 성가시다. 식사 때도 아니고 물어볼 게 뭐 있다고 이러나 싶다. 나는 승무원의 눈을 바라보며 “노!”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의미 파악은 안 됐지만 확률적으로 봐서 내가 “예스”라고 할 만한 내용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다행히 지금까지 나의 이런 찍기영어는 큰 문제가 없었다. 적어도 상대방은 모르겠고 내 입장에서는 그랬다.
다시 눈을 감고 느긋한 비행을 즐기려는데 승무원이 또 무어라고 묻는다. ‘아, 글쎄 아니라니까.’ 속으로 지청구를 하며 승무원을 바라보자 그녀가 활짝 열린 선반을 가리킨다. 선반에 올려놓은 짐과 관련된 내용인 듯 했다. 나도 배낭을 올려놓았기에 그제야 승무원의 복잡 미묘한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주변 승객들의 시선들이 일제히 내게로 쏠려 있다. 이어 내 앞좌석으로 정체 모를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장면도 보인다. 그때 섬광처럼 떠오르는 그것, 1.5리터 생수병.
용수철처럼 일어나 선반 위에 놓인 배낭 옆구리에서 생수병을 꺼냈다. 그러면서도 설마 내가 이 소동의 주범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수병 뚜껑을 돌려보는 순간 감당 못할 외로움과 괴로움에 직면해야 했다. 가장 먼저 진실을 알아버린 자의 외로움과 그 진실의 중심에 자신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괴로움에 정신이 로그아웃 상태가 되고 말았다.
뚜껑은 거의 반 바퀴 가까이 가볍게 돌아갔다. 뜨겁게 달구어진 얼굴로 앞 승객과 승무원에게 급사과를 했다.
자랑 같지만 나는 이 상황에서만은 3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다. “아엠 쏘리”, “스미마셍”, “송구스럽습니다”가 그것이다. 순간적으로 “스미마생”이라는 말이 나오려 했다. 알량한 민족감정 때문에 일본인 행세를 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어떤 언어를 사용할지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이번이 딱 그런 경우였다.
더구나 이런 큰 실수에는 같은 말을 두 번 정도는 반복해서 해줘야 진정성이 느껴지는데 “아엠 쏘리, 아엠 쏘리”나 “송구스럽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보다는 “스미마셍, 스미마셍”이 훨씬 자연스럽다.
결국 영어를 선택했다. 덕분에 일본이나 한국의 국가 이미지가 실추될 일은 없었다. 주변 승객들은 나를 영어권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워낙 발음이 완벽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주변 승객들은 물론이고 승무원과 앞좌석 승객도 크게 나무라지 않아서 더 이상의 망신은 당하지 않았다. 같은 영어권 사람이라서 봐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로그아웃된 정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승무원이 까치발을 하고 선반에 고인 물을 닦아내는 모습을 보면서도 거들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겨우 정신이 돌아올 때쯤 저 아래로 아테네가 보인다. 첫인상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마치 채석장을 보는 듯 삭막하고 황량하다. 그리 높지 않은 산들은 흰 돌이 흉하게 드러나 있고, 하얀 건물들로 이루어진 도시는 창백해 보인다. 여타의 유럽국가들처럼 지붕이라도 붉은색이면 좀 어떨까 싶을 정도다.
내게 그리스는 아름답지는 않아도 고상해야 했다. 세련되지는 않아도 우아해야 했다. 내게 아테네는 아름답고 고상하고 세련되고 우아해야 했다. 어떤 자리에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서 있어도 근사해야 했다. 어떤 자리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토론이 열려도 좋을 만큼 조화로워야 했다.
그런데 지금 저 아래 펼쳐진 아테네는 내게 아테네로 보이지 않는다. 신들의 신 제우스와도,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도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습에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저 돌 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많은 신들이 태어나고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았다니 놀랍고, 저 삭막한 곳에서 일리아드 오디세이아가 탄생했다니 더욱 놀랍고, 저 황량한 곳에서 인류 최초의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더더욱 경이롭다.
너무 흥분했던 것일까. 출구를 찾아 걷다보니 입국 수속절차도 없이 공항 바깥으로 나오게 됐다. 육상입국도 아니고 공항입국인데 이래도 되나 싶다. 혹시 내가 무심코 이상한 동선으로 움직여서 입국심사대를 거치지 않고 나와 버린 건가? 아니면 유럽 간 항공노선 승객은 입국심사 생략인 건가? 탑승할 땐 스킨로션마저 압수하더니. 이도 저도 아니라면 세계 여권 파워 2위인 한국인에 대한 특별우대? 그렇대도 여권은 봐야 우대든 하대든 할 것 아닌가? 혹시 출국할 때 이게 문제가 돼서 외교문제로 확대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확 덮쳐온다. 에라, 그건 그때 가서 일이고, 지금을 즐기자.
이번 여행의 고갱이는 단연 그리스였다. 몇 가지 이유로 무산되고 말았지만 그리스에서 한달살이를 계획했던 것도 죽기 전에 그리스 땅을 밟아보고 싶었던 40년간의 그 마음을 달래 주기 위해서였다.
공항을 나서자 마치 달에 첫발을 디딘 기분이다. 나도 몰래 중얼거렸다.
‘제우스여, 여기가 신들의 나라 그리스입니까? 소크라테스여, 여기가 철학과 문학과민주주의의 땅 아테네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