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추계예술대학교 문예경영대학원 외래교수

나 홀로 벚꽃 놀이를 했다. 수줍은 듯 다소곳이 숨어 있는 벚나무들과 함께. 오래된 아파트 단지 화단에 심겨진 나무다. 굵기로 볼 때 수령이 족히 수십 년은 되어 보인다. 한 두 그루 외로운 벚나무를 바라보는 내가 오히려 부끄럽다. 나무의 고요를 방해한 것은 아닐지.

군락으로 피어 있는 꽃들보다 모양이 선명하다. 한 잎 한 잎 눈을 맞춰 들여다 볼 수 있다. 화단에 떨어진 벚꽃들이 애잔하다. 할머니 어금니처럼 닳은 벽돌에 갇혀 멀리 흩어지지도 않았다. 벚꽃나무 기둥 빨래 줄에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가 봄볕에 흩날린다. 그 주인인듯한 사내가 파자마 차림으로 분리수거를 하고 있다. 봄은 참으로 무심하게 무차별적이다.

바쁜 일상으로 벚꽃놀이 갈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 나무를 위해 바람이 멈춰주지 않듯이, 부모가 자식들 효행을 기다려 주지 않듯이, 벚꽃도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모든 꽃들이 피고 지는데 유난히 벚꽃은 제대로 보아주어야 할 것 같다. 짧은 개화기간이 그 까닭이리라. 유한해서 덧없는 인생을 투영할 것들 중에 이 아담하고 보드랍게 슬픈 꽃잎만한 게 있을까.

인생에서 겪지 말아야 할 것들 중 으뜸이 시기와 질투인데 벚꽃도 비바람의 질시를 피하는 걸 못봤다. 오죽하면 ‘벚꽃비’라는 명명까지 하면서 꽃을 응원했겠나. 고작 일주일도 안되는 벚꽃생의 한가운데 세찬 비바람은 어김없이 몰아친다. 많은 이들의 염원속에 살아남은 이파리 아쉬운 눈길로 쓰다듬을 때 마지막 한 잎도 이윽고 떨어져 간다. 대동아전쟁 말기 일본 청춘들은 ‘사쿠라노요우니’ (벚꽃잎처럼) 산산히 미국 항공모함으로 떨어져 갔다. 약 육천 명에 이르는 가미가제 특공대에 조선인 청년들도 포함되어 야스쿠니 신사에 잠들어 있다.

흐드러지게 모여 있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고독을 즐기는 것이 야수나 신의 영역이었던 지난 날은 가고 많은 인생들이 외로움을 ‘누리며’ 살아간다. 짧은 인생을 부대끼며 살기 싫다는 것이다. 부대끼며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시간들이 때로 슬픈 추억으로 와 닿을 때가 있다. 강아지나 고양이 시중은 들면서 대인 관계를 그토록 꺼리는 게 온당한지 모르겠다. 친구들과 바라보는 벚꽃도 반려견과 바라보는 벚꽃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보는 사람도 보이는 꽃도 시간이 가면 사라진다. 푸바우가 먹던 벚꽃도 떨어지고, 푸바우도 떠나간다.

벚꽃이 추앙 받을 때 목련은 어딘가에서 볼품 없이 나뒹굴고 있다. 하얀 꽃잎이 시체처럼 흉하다. 목련은 필 때부터 지고 난 후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그래서 칭송을 머뭇거리게 된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먼지처럼 사라져 가는 벚꽃에게 목련이 늘 밀릴 수 밖에 없다. 일본 속담에 ‘떠나는 학 뒤를 더럽히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인사이동이 빈번한 직장에서 새겨두면 좋은 말이다. 며칠 전에 포스코 인사가 있었다. 전임 회장의 인사가 일 년은 가는가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어떤 자리는 벚꽃보다 빨리 비우게 되는가 싶다. 벚꽃처럼 깨끗하게 떠나는 모습이 아름다우리라.

점심 때 본 아파트 단지 벚꽃이 저녁까지 눈에 어른거린다. 어딘가 쓸쓸하고 왠지 안쓰럽다. 그 벚꽃을 보고 위안을 느끼며 살아갈 주민들이 부럽기도 하다. 베란다 창 밖으로 꽃잎처럼 떨어지는 말소리들이 도란도란 하다. 내용은 알 수 없어도 잔잔하고 행복해 보인다. 귀여운 어린 아이 소리와 품위 있는 어른의 목소리 같기도 하다. 진해나 여의도, 경주 보문의 벚꽃이나 이 작은 아파트 단지 벚꽃이나 아름다움에 차이가 있을 리 없다. 인간이 매긴 아파트 단지 값은 비록 다르겠지만.

떨어지는 꽃잎을 맞아 본다. 수 억만 년을 넘어 바로 이 봄날에 피어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너는 대체 어느 영혼의 환생이냐. 내 어깨 위로 내려 앉아 무슨 이야기를 전하려는 걸까. 잔인한 사월에 씌어진 어떤 역사, 푸르른 오월 뿜어낼 라일락 향기, 봄 바람에 실려갈 꽃잎들의 재잘거림은 어느 구름, 어느 산기슭에 닿을 것인지. 꽃들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봄은 새벽이라 했다. 어둠이 물러가고 밝은 빛이 다가오는 시기. 겨울의 막막함을 걷어내고 따스한 기운으로 대지를 감싸는 계절. ‘쓸쓸하고 안쓰럽고 엄숙한 잔해 위를 검시 하듯 맴돌던 찬 바람은 어느 서슬엔가 사람들 마음에 부딪쳐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을 건드려 주기도 한다'. 박경리 토지에 나오는 명문장이다. 지난한 삶의 궤적에서 이룬 것, 못 이룬 것 잔해들이 널려 있기 마련이다. 무엇을 잘못해서 요 모양 요 꼴이냐, 그 때 그 일만 아니었어도 이러고 있지는 않을 텐데. 그 인간만 만나지 않았어도…

사람들이 벚꽃을 애람(愛覽)하는 것은 꽃 때문 만은 아니다. 봄이라는 계절이 주는 막연한 위안과 알 수 없는 공포를 달래주기 때문이다. 겨울 혹한을 견뎌 무사히 새 봄을 맞이하는 것은 분명 안도할 일이다. 그러나 발전과 성장 지상주의에서 작년 보다 올해가 조금이라도 나아야 한다는 강박은 봄날의 찬란한 슬픔이다.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벚꽃과 함께 달래고 지우는 것이다. 서러운 추억의 현들을 건드려주고 떠나는 벚꽃들이여 부디 안녕히.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