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승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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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이트 타워 | ||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로마황제 갈레리우스(305~311년 재위)를 기리기 위한 갈레리우스 개선문은 내가 본 개선문 중에서 최고였다. 디미트리오스 구나리스 거리 한 가운데 있는 이 개선문은 아치 상단부분이 파손되어 원형을 잃은 것인지 그 구조와 형태가 유니크하게 보였다. 뻔하지 않아서 반가웠고 진부하지 않아서 좋았다. 아름다움은 뻔하지 않은 데서 오고 감동은 진부하지 않은 데서 찾아온다.
원래 중앙의 돔 지붕, 거대한 네 개의 기둥과 두 개의 보조 기둥으로 이루어진 장엄한 구조물이었다고 하지만 원형 복원도나 상상도를 보지 않아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원형도 일반적인 개선문과는 확연히 달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상단의 붉은 벽돌과 하단의 흰 대리석의 대비도 신선하다. 흰 대리석 부분의 양쪽 굵은 기둥은 사산제국과의 전투장면을 비롯하여 승리를 기념하는 다양한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정교하고 디테일한 묘사가 부조 속의 인물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개선문에서 북쪽으로 150여 미터 더 들어가면 성이나 타워를 연상케 하는 붉은 돔이 나타난다. 갈레리우스 개선문과 같은 붉은 벽돌을 켜켜이 쌓아 만든 건축물 로톤다이다.
당초 로마의 판테온과 같은 구형 돔으로 맨 위에 오쿨루스(원형의 창)를 둘 계획이었다고 한다.
갈레리우스가 자신의 무덤으로 쓰기 위해 지은 것으로 추정되나 그가 311년 사망한 후 묻힌 곳은 현재 세르비아 감지그라드 부근의 로물리아나라고 한다.
갈레리우스 황제는 재세 시에 그리스도교를 핍박하다 병을 얻은 후 311년 봄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심지어 병이 깊어지자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생전에 종교적 박해를 일삼던 황제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돌연 개심한 것은 인간적이긴 하나 황제답지는 못했다. 그의 변심은 회심(回心)이었을까, 회심(悔心)이었을까. 어느 쪽이었든 죽음을 앞둔 자의 개심은 미심쩍다. 신도 그런 그의 개심에 그다지 진정성을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황제는 기도 요청 6일 만에 신의 부름을 받았고, 로툰다에 묻히려던 뜻도 이루지 못하고 서둘러 저 세상으로 떠났다.
400년경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인정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로톤다는 그리스도 교회로 전용(轉用)되었다. 이에 따라 로톤다 내부는 비잔틴 특유의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며 그 중 일부가 아직 남아 있다.
그 후 오스만 튀르크 지배 시절에 로톤다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옆에 굴뚝처럼 서 있는 첨탑 미나렛이 그 흔적 중 하나다.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의 결과 테살로니키가 그리스 영토의 일부가 되자 로톤다는 다시 교회로 바뀌었다. 이러는 사이 무덤 목적으로 지어진 로톤다는 수차례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로툰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유서 깊은 종교시설물들에는 다른 종교의 색체가 깊숙이 배여 있는 경우가 많다. 짧게 보면 운명의 기구함에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길게 보면 종교적 통섭과 융합의 과정이니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유산이라 해야겠다.
거대한 붉은 돔 앞쪽에는 역시 붉은 벽돌로 된 구조물들의 흔적이 펼쳐져 있다. 황제는 자신의 무덤 앞에 무엇을 지어 위안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일까. 굵은 쇠창살로 둘러쳐진 유적지를 둘러보며 저 먼 세르비아 땅에 잠들어 있는 황제를 떠올려 본다.
로툰다는 테살로니키의 초기 기독교 및 비잔틴 기념물군의 일부로 인정받아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었다.
맨 안 쪽의 로툰다와 중간의 개선문에 이어서 직선으로 남쪽 방면의 테르마이코스만 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갈레리우스의 궁전이 발굴 중이다. 넓은 터에 붉은 벽돌로 된 건물 일부가 흉물처럼 남아 있다.
테살로니키의 시그니처인 화이트 타워는 로툰다, 개선문, 궁전 터 등 갈레리우스 유적지와 남북으로 거의 일직선상에 자리 잡고 있었다.
12세기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이 탑의 본명은 레프코스 피르고스다. 테르마이코스만을 따라 세워진 화이트 타워는 오스만 튀르크 시대 항구의 성벽 구축 시 오래된 타워를 허문 자리에 30미터 높이로 세워졌다. 항구를 지킬 목적이었다. 지금은 성벽의 흔적은 없고 오직 이 탑만 남아 있다.
둥근 기둥 형태의 타워에는 중간 중간 작은 감시창으로 보이는 사각의 구멍들이 보인다. 요새로 지어진 이 탑은 18~19세기 감옥으로 전용되었다고 한다. 당시 반란군들에 대한 대량학살이 일어나 '피로 물든 탑'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1912년 테살로니키가 그리스 령이 되자 개수되어 하얗게 칠해지고 화이트 타워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화이트 타워를 보니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보았던 벨렝탑이 떠오른다. 16세기 초 요새로 지어진 그 탑도 나폴레옹 지배시절 감옥으로 사용되어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대서양이 만조가 되면 감옥 안으로 밀려들어온 바닷물에 익사하기 일쑤였다던 그 악명 높은 벨렝탑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역사를 간직한 화이트 타워에는 지금 비잔틴시대의 유물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지역에서 출토된 도자기와 모자이크 바닥재 조각들, 오스만 튀르크 제국 당시의 사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맨 윗층에는 간단한 기념품도 판매한다.
요새로 지어졌다가 잔혹한 살육의 현장이 되어야 했던 벨렝탑과 화이트 타워의 꼭대기는 오늘날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훌륭한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무심히 탑 주변을 오가고 탑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역사란 이런 것이다. 그곳이 리스본이든 테살로니키든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을 밟고 서서 미래를 본다. 그들의 발아래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속절없이 죽어갔는지 기억하는 이 없이….
이렇게 상처 위에 새 살이 돋고 새 살은 상처를 잊는다. 그때 상처는 그런 새 살을 허심히 바라보면 비로소 역사가 된다. 한 사람의 생애도, 한 나라의 역사도 그렇게 상처와 새 살이 한데 엉겨 서로가 서로를 잊은 채 끌어안고 살을 비비며 이루어낸 성과물이다.
타워 앞에서 출발하는 세 척의 유람선은 한 두 시간 간격으로 운항된다. 해적선 콘셉트의 검은 유람선에는 무스카 살라타, 파이로스키, 스파게티나 지중해 특유의 향신료와 허브를 넣은 다양한 요리를 제공한다. 그리스 전통 와인과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칵테일, 레티나 와인도 즐길 수 있다. 유람선에서 커피만 마셔도 된다는 것을 몰랐던 여행자는 테살로니키의 낭만을 누려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