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승 여행가

조국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속에서 쇼팽은 분출되는 감정을 피아노 선율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거친 옥타브와 빠른 패시지로 이어지는 곡은 격정과 슬픔, 분노로 가득 찼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혁명 에튀드(Op. 10 No. 12)>였다. 이 곡은 쇼팽의 억눌린 감정의 폭발이자 조국에 대한 그의 비애와 저항 정신이 담긴 선언문 같은 작품이었다.
이듬해 쇼팽은 빈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이번엔 정치적 망명이었다. 조국 폴란드의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지지가 명확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는 러시아 통치 하의 폴란드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20대 초반부터 반체제적 예술가였던 셈이다.
파리는 1830년 7월 혁명 이후 자유와 혁신의 중심지로 떠오르며, 예술적 시도와 표현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개방적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폴란드 망명 정부가 루마니아를 떠나 새롭게 들어선 곳이 바로 파리기도 했다.
파리에서 쇼팽은 자신의 음악에 폴란드의 민족적 정체성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담아내어 큰 감동을 주었다. 그의 <발라드 1번 G단조(Op. 23)>는 망명자로서의 고독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 자유를 향한 열망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곡의 서주는 신비롭고도 어두운 화성 진행으로 시작되며, 차분하게 흘러가다가 격렬한 감정의 폭발로 이어진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화려한 성공과 달리 그의 심신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그의 내면은 암담한 조국의 현실로 인한 고통과 그리움으로 멍들어 갔으며, 11월 봉기 실패에 대한 충격 이후 발병하기 시작한 결핵으로 쇼팽의 육신은 망가져 갔다. 6살 연상의 연인 조르주 상드와 함께 요양 차 찾은 스페인 마요르카의 집주인은 기침과 각혈까지 하는 쇼팽을 보고 놀라 내쫓기까지 했다.
폐결핵과 함께 조르주 상드와의 관계도 악화일로에 놓였다. 상드는 늘 곁에서 그의 건강을 돌보며 지켜 주었지만 둘의 성격 차이와 예술적 갈등은 점점 더 깊어졌다. 조르주 상드라는 남성적 필명과, 시가를 피우는 남장 여성이란 콘셉트, 노골적 성애 장면을 묘사하는 작품 세계, 남성 편력이 심한 페미니스트라는 그녀의 아이덴티티는 예민하고 감정적이며 비사교적인 쇼팽과는 사실 처음부터 많이 달랐었다.
1847년 쇼팽은 연인 조르주 상드와 9년간의 동거 생활을 끝냈다. 2년 후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극심한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그의 누나, 제자들과 함께 임종을 지켰던 친구는 “고통스럽지만 존엄한 죽음이었다.”라고 묘사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조국 폴란드를 잊지 못했다. 쇼팽은 죽음을 앞두고 친구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내 시신은 프랑스에 묻히더라도 나의 심장만이라도 조국 폴란드로 보내 달라.”
러시아 당국이 반러시아의 상징인 쇼팽의 시신이나 유해조차 폴란드로 돌아가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쇼팽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유해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심장을 폴란드로 보내는 과정은 당시 러시아 제국의 감시와 억압 때문에 쉽지 않았다. 쇼팽의 누나 루드비카가 수차례의 위험한 순간을 넘겨가며 가까스로 쇼팽의 심장을 바르샤바로 가져가는 데 성공했다. 1850년, 그의 사후 약 1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진 귀국이었다.
심장은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으며 이는 폴란드 민족에게 깊은 감동과 위로를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하는 망명 음악가로서 음악을 통한 그의 저항은 억압받는 민족의 자부심을 되살리고 자유를 향한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는 외침이었다. 그는 건반 위의 시인이자 건반 위의 레지스탕스기도 했다.
쇼팽의 음악이 단순한 예술적 성취가 아니라 조국을 위한 지성적 저항의 수단이었음을 보여주는 한 장면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피아니스트(감독 로만 폴란스키)> 속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폐가에 숨어 있던 유대인 슈필만이 나치 장교 호젠펠트에게 발각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슈필만이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치 장교가 폐가에 남겨진 피아노를 연주해 보라고 한다. 건반 앞에 앉은 슈필만이 독일 음악가 바흐가 아닌, 폴란드의 심장 쇼팽을 연주하는 장면은 소심하고 심약한 주인공이 보여주는 최고의 반전이었다. 더욱이 <발라드 1번>은 망명자 쇼팽이 조국에 바쳤던 곡이자 억압받는 폴란드 민족의 비탄을 담은 곡이었다. 절박한 순간 나치 장교 앞에서 유대인 슈필만이 연주하기에는 너무나 부적절한 곡이었다. 그럼에도 이 곡을 연주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의 심장 속에 쇼팽이 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슈필만은 <발라드 1번>을 연주하기로 결심한 순간 이미 이 곡을 가장 잘 해석하고 가장 잘 표현한 연주자가 되었던 셈이다.
호젠펠트는 이 장면에서만 매우 짧게 등장할 뿐더러 쇼팽의 음악이 그의 윤리적 결단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나치 장교 호젠펠트가 쇼팽의 음악을 듣고 인간적 결단을 내리는 모습은 영화에서는 짧게 처리되지만 실제 역사적 맥락에서는 더욱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호젠펠트는 슈필만을 구해준 실제 인물로 그는 일기와 기록을 통해 나치 체제의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 깊이 회의한 사람이었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고 고통 받는 장면을 목격한 그는 독일 민족 전체가 이러한 비인간적 행위로 인한 오명을 영원히 씻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개탄했다.
그런 그에게 쇼팽의 음악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일깨우는 강력한 트리거로 작용했다. 물론 호젠펠트는 본래 여러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을 구하려고 노력한 지성적 인간이었지만 영화 속에서 쇼팽의 음악은 그의 인간적 행동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쇼팽의 음악이 지닌 저항 정신과 자유의 메시지는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윤리적 의식을 더욱 강하게 자극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끊임없이 성찰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전후 호젠펠트는 소련군에 의해 전범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1952년 소련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치 체제 하에서도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현실에 저항한 지성인의 표상이었다. 그는 단순히 나치 군인이 아니라, 나치 체제의 부조리에 저항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가 투옥과 고문 끝에 차가운 감옥 바닥에 쓰러져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을 때, 두려움과 고통 대신 그의 귓가에 쇼팽의 <발라드 1번> 선율이 들려왔기를, 그 선율 속에서나마 평온했기를, 그의 심장만이라도 쇼팽처럼 자신의 조국 독일에 묻혔기를.
쇼팽이 생전에 예술을 통해 조국의 자부심을 지키려 했듯, 호젠펠트도 그의 심장 속에 쇼팽의 선율을 간직한 채 조국 독일에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일깨우는 상징이 되었다.
쇼팽은 직접적인 무력 투쟁 대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예술을 통해 조국을 지키고 민족의 자부심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그는 부조리한 조국의 현실에 분노하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수 있음에도 주저하지 않고 현실에 개입해 예술로 저항한 실천적 지성이었다. 오늘날 그의 음악은 여전히 억압 받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저항의 영감을 주며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싸우는 지성인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