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승 여행가

반면 동방정교 성당은 돔 중심의 수평적 구조를 통해 부드럽고 안정적인 인상을 준다. 돔은 하늘과 지상의 조화를 상징하며 포용적이고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구조는 신과 인간이 함께하는 공동체적 연대와 영적 교감을 강조한다. 동방정교 성당의 외관은 높이 솟지 않고, 차분하고 균형 잡힌 구조를 통해 압도감보다는 친밀감과 평온함을 전달한다. 이처럼 두 성당은 서로 다른 신학적 관점을 건축 양식으로 시각화한다. 유럽의 여러 성당들을 둘러보면 건축은 교감이자 메시지라는 것을 오감으로 실감하게 된다.
80m에 이르는 높이와 3500㎡에 이르는 내부면적을 자랑하는 베오그라드의 성 사바 성당은 세계에서 두 번째 큰 동방정교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그렇게 거대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크기와 높이로 압도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일 수 있는데 성 사바 성당은 그런 점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성 사바 성당은 세르비아 정교회의 창시자인 성 사바(Saint Sava)를 기리기 위해 1935년에 착공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과 유고슬라비아 내전 등으로 인해 완공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성당의 외관은 1980년대 후반에 완성되었으나, 내부의 모자이크 장식과 기타 예술 작업은 최근까지도 진행되었다.
성 사바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창립한 인물로 그의 신앙과 업적은 세르비아 민족의 종교적 자부심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는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세속적인 삶을 포기하고 아토스 산에서 수도승의 길을 걸으며 세르비아 정교회의 기틀을 다졌다.
이후 그는 첫 번째 세르비아 대주교로서 세르비아 정교회를 확립하고, 세르비아 정체성과 독립성을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스만 제국은 1235년 성 사바가 사망한 후 그가 안장된 수도원을 공격하여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성 사바가 세르비아인들의 민족적, 종교적 단결과 저항의 구심점이 될 것을 두려워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세르비아인들의 민족적 결속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성당이 세워진 이곳이 바로 성 사바의 시신이 불태워진 곳이다. 유해조차 수습하지 못한 세르비아 사람들은 상실감과 슬픔을 다져 터를 삼고 그 위에 이렇듯 곱고 성스러운 성당을 지어 올렸으니 슬픔이란 얼마나 위대한 건축가인가.
성당 내부를 들어서면 돔 천정에서 두 팔을 벌린 자세를 취한 예수의 상반신 모자이크(판토크라토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치 “무겁고 짐 진 자들아, 어서 오너라”하며 금방이라도 따뜻한 포옹을 건넬 것 같다.
입구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제대 쪽으로 이어진 웅장한 공간이 펼쳐지고, 제대 주변 벽에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성인들과 성 사바의 성화들이 빛을 받으며 자리하고 있다. 성직자의 복장을 한 성 사바가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세르비아 민족을 축복하는 모습은 정면 벽화로 인상 깊게 표현되어 있다. 그 외에도 성 사바의 서품 장면, 설교 장면 등 세르비아 민족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한 벽화와 모자이크가 곳곳에 들어서 있다.
이처럼 성 사바 성당은 세르비아의 종교적 자부심이 담긴 곳이며 세르비아 정교는 그들의 정신적 뿌리이다. 그러나 발칸 반도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문명충돌의 또 다른 한 쪽 축이기도 하다.
사실상 세르비아가 발칸의 화약고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면에는 여러 종교 간의 갈등이 있다. 동방정교, 로마 가톨릭, 그리고 이슬람이라는 세 가지 주요 종교가 발칸 반도에서 서로 부딪히며 복잡한 갈등의 역사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세르비아는 동방정교회의 일원으로서 다른 민족 및 종교 공동체와 끊임없이 대립하며 발칸 지역의 종교 갈등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세르비아가 속한 동방정교회는 1054년의 동서 교회 대분열을 통해 로마 가톨릭과 갈라섰다. 이 분열은 필리오케 논쟁과 같은 신학적 갈등이 원인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요소들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필리오케 논쟁이란 로마 가톨릭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믿는 반면 동방정교는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나온다고 주장함으로써 촉발된 논쟁을 말한다. 양측의 신학적 입장 차이는 두 종교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더 심각한 것은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었다. 로마 가톨릭이 교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하는 반면 동방정교는 각 지역의 총대주교들이 자치권을 행사하며 각 민족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구조를 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은 세르비아가 발칸의 종교적 갈등의 중심에 서게 한 단초가 되었다. 세르비아 정교회는 민족적 자부심과 정체성을 결합하여 다른 종교 공동체와의 충돌에서 정교회 신앙을 중심으로 저항을 선택했다. 특히 크로아티아의 가톨릭과 보스니아의 이슬람 신앙은 세르비아 정교회와 대립하면서 발칸 지역의 민족적, 종교적 갈등을 증폭시켰다.
세르비아는 오랜 기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은 탓에 이슬람과의 종교적 갈등도 깊었다. 세르비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종교적 갈등은 정치적·문화적 억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에서 이슬람 개종을 강요했다.
성 사바가 세운 세르비아 정교회는 세르비아 민족의 저항 정신을 고취시켰지만, 종교적 배타성과 민족주의를 부추겨 갈등을 조장한 면도 있었다. 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보면 신과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인간을 위한 신이 아니라, 신을 위한 인간이 되어버린 그들의 도치된 관계에 대하여 묻고 싶어진다. 인간을 위한 신, 평화를 사랑하는 신은 대체 어디에 있냐고.
유대인들은 과거 반지성적 폭력의 최대 희생자였지만 오늘날 이스라엘은 또 다른 형태의 종교적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다. 디아스포라와 홀로코스트라는 아픔을 겪었던 유대인들이라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지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반지성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반지성의 가해자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기에 말이다.
종교적 갈등은 전 세계 주요뉴스를 수시로 장식한다. 미얀마에서는 로힝야족이 불교 신앙을 가진 미얀마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으며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이슬람 간의 갈등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종교적 신념이 어떻게 반지성적인 폭력과 분열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종교는 지성의 억압에도 앞장섰다. 대표적인 사례가 17세기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재판이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다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발을 사 연구 결과를 철회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대신 평생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 교회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상가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수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이단으로 몰려 처벌받았고, 마녀 사냥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의 탄압도 자행되었다. 이들은 종교적 교리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잃거나 추방당했다. 이처럼 종교는 때로 인간의 지성과 자유로운 사유를 억누르며 진리 탐구를 막아왔다.
종교가 전쟁을 일으키고 종교가 살육과 억압을 자행하는 이 인류의 뿌리 깊은 어리석음은 언제쯤 극복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진정으로 섬기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하늘에 있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 내면에 깃든 지성이다. 지성은 인간에게 비판적 사고와 성찰을 가능하게 하며 종교적 신념이 폭력과 억압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아준다. 성 사바 성당의 신비롭고 성스러운 모자이크와 벽화들을 바라보며 진정한 종교와 지성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지성은 신성을 향한 첨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