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태 공학박사(SNS 라이프기자)
두 번째로 유명한 사과는 영국왕립 과학자인 물리학자인 아이작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가능하게 한 사과였다. 1665년 영국에는 흑사병이 전국적으로 유행하자 전국의 학교가 폐교를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앉아 졸다 사과 하나가 자신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왜 물체는 위나 옆으로가 아니고 항상 아래로만 떨어지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고 자신의 의문을 중력이라는 힘을 물리적으로 규명하였다.
그리고 세잔의 사과가 있다. 프랑스 화가인 폴 세잔은 고흐, 고갱과 더불어 후기 인상주의 대표 작가로 알려 져 있다. 그는 정물화를 즐겨 그렸고 주로 사과 그림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그의 정물화는 전통 정물 표현 기법과 다르게 그려져 현대 미술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의 화풍은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사물의 형태에 대한 시점을 고정된 것에서 여러 방향에서 바라 본 다시점으로 표현하는 기법이었고, 이 것은 고갱을 거쳐 마티스, 브리크, 그리고 피카소에 까지 영향을 주게 되며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또 하나는 실존 인물은 아니고 스위스 설화로 전해지는 석궁의 명인 빌헬름 텔의 사과이다. 14세기 초엽으로 스위스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였고 오스트리아 총독은 야만적인 사람이었다. 길가에 높이 오스트리아 왕을 상징하는 모자를 걸어 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경례하도록 강요했다. 때마침 '윌리암 텔'이 여섯 살 난 아이를 데리고 그 앞을 지나치면서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이의 머리 위에 사과를 얹고 텔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였다. 차마 아들을 향해 활을 당길 수 없었지만 아들의 편안하고 밝은 표정의 미소를 보고 활을 당겼다. 화살은 시위를 떠나 정확히 사과 한 가운데에 명중시키며 피지배자의 울분을 달랬다.
개인적으로 스킨 스쿠버는 나름 안전한 장치를 갖추고 있는 레포츠이지만, 공포에 질린 사건이 하나 있었다. 해병대에 입대한 아들이 자격증을 따고 싶다 해서 직접 바다로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해병대 기초훈련도 마친 아이는 건장했고, 휴가 나온 며칠 차에 스쿠버 자격을 취득하려고 했다. 대개 다이버들이 좋아하는 14 ~ 16미터의 수심도 아닌, 3 ~ 5미터 해변에 있는 깊이로 안내했지만 그 때만큼 무서운 적이 없었다. 어차피 익사하려면 15미터도 필요 없이 2미터만 들어가도 화를 입으니 깊이에 대한 차이가 없는 셈이지만, 당시 무서워서 한 시도 아들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빌헬름 텔은 참 대단한 아버지인 셈이다.
또 하나는 IT 혁명을 일으킨 사과로서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그것이다. 애플사의 아이폰에 복잡한 최신 정보통신 기술을 집약했고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휴대용 통신기기를 탄생시켰다.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그것은 혁신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탁월한 전략으로 21세기를 뒤바꾼 IT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한 시대의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대세의 흐름, 물줄기를 바꾸어 버린 것으로 인류 문명의 새 장을 연 것이라고 칭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인류 문명의 새로운 장을 연 셈이다. 향 후 우리의 미래 먹거리도 창조와 혁신, 지식과 기존 틀을 벗어나는 창의적인 사고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 사과 이야기이다. 얼마 전, 가까이 지내는 교수님과 대표님, 이 분들과 함께 따뜻한 차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로 덕담을 나누다가 산림과 자연환경에 친화적인 학문을 가르치시는 교수님으로부터 또 다른 사과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던 적이 있다. 그것은 ‘기무라 아키노리’ 라는 일본 농업가의 사과 이야기였다. 농사를 짓는 분들의 말로는 사과가 농약을 많이 쓰이는 이유가 해충이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일본의 농부는 잎을 갉아먹고 있는 벌레를 유심히 쳐다보니 그렇게 눈망울이 곱고 선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해충을 잡아먹는 더 큰 개체의 눈이 사나웠다는 것이다.
풀을 먹고사는 작은 개체는 순하고, 그 개체를 잡아먹고 사는 더 큰 개체가 오히려 사나운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한 개체에게 해충이라는 이름을 부여해서 나쁘게 낙인을 찍어버린다. 그래서 그는 그 벌레들을 잡으려 농약을 치지 않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과농사를 개발했고, 그것이 유명한 ‘기무라 아키노리’의 사과였다. 선입견과 누명, 타인이 정한 대로 부르는 오판의 허를 그 생명의 사과 뿐 아니라 여러 사과가 답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