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윤 풍수칼럼니스트

같은 날 오전 8시경 일본군 보병 200여명이 매복 사실을 모른채 백운평 골짜기로 들어왔다. 일본군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을 때 김좌진 장군의 신호를 시작으로 우리 독립군들은 일제히 사격하였다. 허둥거리며 아무데나 총을 쏴대었던 일본군 전위부대는 거의 전멸하였다. 뒤이어 쫒아온 일본군 본대와 매복 독립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일본군은 높은 고지 위에서 조준사격하는 독립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일본군은 3천명에 달하는 막대한 희생을 치른다. 이것이 바로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의 역사이다.
청산리전투는 독립군의 죽을 각오로 싸운 것과 계속된 전투에 독립군의 입에 주먹밥을 넣어준 아낙네의 도움으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형지세를 읽고 그곳에 맞는 전략과 전술을 세운 전투풍수(戰鬪風水)에 탁월한 식견을 가진 김좌진 장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아쉽게도 1930년 1월 24일 북간도 중동선 해림현 산시역에서 박상실(朴尙實)이 쏜 총탄에 피살되어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은 신안동김씨의 대표적 인물이다. 안동에 본(本)을 두고 있는 명문가로 (구)안동김씨와 (신)안동김씨가 있다. (구)안동김씨의 시조는 김숙승(金叔承)이고 (신)안동김씨의 시조는 고려 개국 공신인 김선평(金宣平)이다. 김선평은 신라 말 고창군(古昌郡)의 성주로서 권행(權幸), 장길(張吉)과 함께 고창(병산)전투에서 견훤의 후백제군을 격퇴함으로써 고려태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 공으로 그는 고려삼한벽상공신태사(高麗三韓壁上功臣太師)에 봉해지고 본향인 고창군이 부(府)로 승격되어 안동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신안동김씨는 고려개국의 공신가문이자 현재의 안동을 탄생시킨 명문가인 것이다.
시조 김선평의 묘는 한때 실전이 되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시기가 있었지만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근거로 여러 방면으로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문정공 김상헌의 시도가 있었고 그 후 김연(金縯) 등의 시도가 있었으나 이 역시 묘소를 찾는 데는 실패하였다. 1695년 10월에 할 수 없이 시조묘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근처에 묘단(墓壇)을 설치, 재사(齋舍)를 건축하고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1878년에 발간한 무인보(戊寅譜)에는 시조단의 산도(山圖)가 실려있다. 산도의 최상단에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묘단도(墓壇圖)’라고 하고 오른쪽 아래에 ‘안동부(安東府) 삼십리(三十里) 서(西), 후면(後面) 태장(台庄)’이라 표기되어 있어서 그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산도의 중앙에 있는 ‘태사공묘단’이라고 표시된 곳은 주변보다 과장해서 그려 두었다. 사각형과 그 안에 원(圓)을 그려 묘단을 표시하고 있다. 묘단 위에 자좌(子坐)라는 표시는 묘단의 좌방위를 나타낸다. 즉 윗부분이 북쪽이라는 의미이다.
김선평을 기리기 위한 묘단에 특정한 형국이름을 붙이면 ‘모란반개형(牡丹半開形)’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묘단의 자리는 ‘화심혈(花心穴)’에 해당하는 것이다.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며 꽃 중의 꽃이다. 그런데 활짝 핀 만개(滿開)가 아니라 반개(半開)라고 한 것은 최고 정점의 상황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더 발전해갈 수 있는 여지를 두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산도를 자세히 보면 묘단의 뒤쪽에 입암(立巖)이 있고 동쪽으로 인암(印巖)이라고 표시하고 있으며 이는 학업운과 관운(官運)을 기원하는 의미로 보인다.
(신)안동김씨는 고려시대 김습돈(金習敦)을 일세(一世)로 하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였다. 조선 전기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사간원 대사간, 도승지, 사헌부 등의 벼슬에 오르면서 가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후 김번(金璠1479~1544)이 문과에 급제한 이후부터는 한양을 근거로 하는 명문가로 발전하였다. 김번의 후손으로 왕비가 3명, 후궁 1명, 종묘공신 6명 그리고 수많은 판서와 당상관이 있다. 특히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항전을 주장하였던 인물이다. 그 외 조선 말기 개화사상가인 김옥균, 대한민국의 제15대 국회의장을 지낸 김수환 또한 신안동김씨의 후손이다.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말해 봅시다” 이것은 1947년 백범 김구선생의 ‘백야 김좌진 장군의 추도사’의 일부분이다. 요즈음의 시기에 김좌진 장군의 말씀이 귀감이 된다. 1913년 서대문 형무소를 출소하면서 한 말이다.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