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진 문학(사학)박사
이때 왕권에서 이탈되거나 멀어진 왕족 및 귀족들, 그리고 6두품 중에는 신분의 벽을 가진 신라사회에서 더 이상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당나라 유학을 통해 신라사회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집단이 있었다.
이들 부류는 크게 유학적 소양을 가진 부류와 승려 집단이 있었다. 먼저 유교적 소양을 가진 세력에는 6두품 그룹에서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등 젊은 기예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하게 되었고, 불교계에서는 도의, 홍척 등의 소장파 승려들이 당나라 유학을 하고 신라로 돌아와 그들의 뜻을 펴고자 하였다.
선문9산 출신의 유학승들은 대부분이 권력에서 밀려난 왕족 또는 6두품 이상의 하위 귀족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은 배후에 국왕 또는 왕자나 공주의 후원세력을 가진 나름의 실력자들이었다.
예를 들면, 실상산문을 개창한 홍척의 제자 수철은 본래 그의 증조부가 신라의 진골인 소판이었고, 성주산문의 개창자 낭혜화상 역시 무열왕의 8대손으로서 그의 가문이 본래 신라 진골이었으나 그의 아버지 범청 대에 이르러 6두품으로 격하된 가문이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하여 실상산문은 선강태자와 단의장옹주의 후원을 받고 세워졌으며, 경문왕의 자문을 맡았던 성주산문의 낭혜화상 또한 충청도 보령지역에 연고를 가진 인물로서 성주사를 세움에 있어 신라왕실의 도움을 받았다.
범일은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 염관 재안의 법을 받아 귀국한 후 연고지인 강릉에 사굴선문을 개창하였다. 그가 건립한 굴산사 또한 이 지방의 군주인 김주원의 후원을 받아 건립되었고 그 뒤에는 강릉의 사실상 실권자였던 왕순식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선문 승려들이 모두 좋은 배경과 가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진감선사 혜소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매우 가난하여 중국을 왕래하는 뱃사공으로 있다가 유학승이 된 경우에 해당하며, 희양산문의 개창주인 지증대사는 당에 유학을 하지 않고도 9산의 선문을 개창한 인물이었다.
중국에서 달마의 선종(남종선, 조사선, 간화선)을 신라에 도입해 퍼뜨린 주역들은 이들 9산 선문 이외에도 많이 있었다. 이러한 선풍(禪風)의 유입은 신라의 쇠퇴기에 스스로 가진 능력을 펼칠 수 없었던 유학승들이 그들의 돌파구를 찾은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신라 말 선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선문구산은 중앙정권에서 이탈한 지방호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즉 9산선문은 지방호족들의 세력기반을 배경으로 성립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성주, 장군을 자칭한 지방 세력들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유랑 농민이나 유리걸식하며 도적이 된 무리의 군적(群賊)들도 그들의 무력의 원천으로 삼기도 했다. 이 무리 도둑들 중의 일부는 선종의 영향을 받아 선종의 승려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도적의 무리들이 부유한 절을 노략질의 대상으로 삼아 재물을 약탈하는 사례가 빈번히 일어나자 선문에서는 자체의 무력을 보유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9산선문은 사원 자체의 무력을 갖추어 나갔으며 이들 무력을 통솔하기도 하고 후원하는 호족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후삼국의 혼란기에 왕건을 도와 청도 운문사의 승려 보양이 후백제군(사실은 견훤을 지지하는 도적떼 또는 산적으로 추정됨)을 물리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왕건은 그 공로를 치하하여 토지 500결과 조 50석을 하사하고 절 이름을 ‘운문선사(雲門禪寺)’ 라 사액하였다.
이 후 운문사는 선종사찰의 대표적 사원으로 고려 중기 원응국사 학일의 중창기를 거쳐 한 때 승려 3,000명을 능가하는 전국 2대 사찰이 되었고, 충렬왕 시기에는 일연(一然)이 주지로 있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편 중국 선종은 인도의 왕자 달마가 중국의 양나라로 건너와 선종을 전파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이 무렵 중국에서는 선종이 크게 세력을 떨쳤다.
특히 마조 도일과 6조 혜능의 시기에 이르러 선풍이 크게 떨쳤다. 그래서 신라의 많은 유학승들은 달마의 새로운 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건너갔다.
중국 선종의 계보는 달마-혜가-승찬-도신-홍인-신수 및 혜능으로 이어진다. 그 중 신수는 북종계열이고, 혜능은 남종계열이다. 신라 말의 구산선문의 경향은 가지산문의 도의가 들여온 혜능의 남종선 이었다. 중국 선종의 신라에의 유입 과정을 보면, 도의 이전에도 신라사회에 북종선이 도입이 된 바가 있었다.
8세기 중반 경 신라의 법랑이나 신행은 중국에 들어가 중국 선종 4조 도신의 법인을 받아 이를 신라사회에 전하였으며, 이들은 북종선의 전법 문인들이었다.
도신의 북종선은 소의 경전을 ‘능가경’으로 하였으며, 신행은 수일불이(守一不移)를 중시하고 ‘안심’과 ‘간심’을 수행방법으로 하는 것으로서 기존의 교학 불교사상과 크게 배치된다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기존 교단과의 마찰도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9산의 개조인 도의가 들여온 남종선은 기존의 교학 불교와는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기존의 교단과 화합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라 말 엘리트 유학승들이 귀국하면서 가지고 들어온 선종은 6조 혜능의 남종선으로서 이는 교학 불교가 지배하던 신라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도의는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며 제자 염거에게 선종을 전하고 염거는 다시 체징에게 전수하여 장흥 보림사를 중심으로 선풍을 펼쳐나갔다.
깊은 교리를 연구하지 않더라도 ‘오로지 한 마음으로 정진하면 일시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사상은 본래 석가모니가 가섭에게 꽃 한 송이를 들고 빙그레 웃을 때 가섭이 이를 알아채고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시중의 미소’에서 비롯한다.
달마를 통해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신라로 들어온 이 불교 사상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질적인 불교의 경향이었다. 즉 신라사회에서는 이들 유학승들이 중국에서 도입한 선종이 당시에는 이해되기 어려웠다. 평생을 연구하고 수양을 해도 깨우치기 어려운 기존의 교종 중심의 불교계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9산선문의 개창자들의 1세대에서는 신라의 국왕이나 왕족들이 왕권의 강화를 위한 방안으로 이들을 초빙하였으나 극히 일부만 왕의 자문에 응했을 뿐이었고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떠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신라 왕실의 쇠퇴와 지방호족의 득세가 맞물린 혼란기에 치열한 정쟁을 벌이는 사회적 환경 때문이었다.
이처럼 9산의 개조들은 대체로 기존의 교종 중심의 교단과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는 신라왕궁을 떠나 지방의 깊은 산속에 은거하여 제자를 기르며 스스로 실력을 닦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선문(禪門)의 2세대, 3세대에 이르면,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사회로 넘어가면서 선문들은 각 지방의 호족들에게 발탁됨으로써 그들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이들은 비로소 새로운 불교인 선종을 세상에 펼칠 수 있었다.
후삼국시대에는 각 호족이나 국왕 중 가장 유력한 선문을 영입한 세력이 백성들의 지지를 많이 받는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무엇보다도 선종은 중앙정권의 통제를 싫어하는 지방호족 세력들의 정치적 성향과도 들어맞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호족들은 구산선문에 귀의함으로써 그들을 정신적 후원 및 자문을 구하는 협력 세력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반대 입장에서 보면 선문은 각 지방의 깊은 산중을 근거지로 하여 그들의 불교사상을 펼치기에 알맞은 권력집단이 호족세력이었던 것이다.
선종과 호족의 결합은 처음에는 당시 가장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던 후백제의 견훤이 선두의 위치에 있었으나 점차 태봉의 궁예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많은 선문9산의 승려들이 왕건을 지지하게 되었다.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관심법’이라는 심법을 빙자하여 유명 선승들을 힘으로 누르며 탄압하자 이들은 점차 궁예를 멀리하고 왕건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특히 왕건의 귀의를 받고 왕건을 따라 궁성에 갔던 가지산문 체징의 제자 형미(逈微)가 궁예에 의해 처형된 사건은 궁예 정권의 판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궁예와 왕건 사이에 조금씩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궁예가 왕건에 의해 왕권을 빼앗길 시점에 이르러서는 상당수의 선문 승려들은 왕건의 지지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왕건은 여러 호족 중 가장 많은 선종 세력을 보유한 실력자로 성장해 갔다.
비록 이 시기 구산선문이 불교계를 주도할 정도의 세력은 되지 못하였으나 쇠퇴의 길로 접어든 신라 왕실이나 신흥 호족세력에게는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신라 문성왕의 자문역을 맡았던 동리산문 개창주 혜철은 전라도 곡성에 태안사를 건립하고 국가의 시정책을 왕에게 올렸으며, 그의 제자 도선(道詵)은 중국에서 풍수지리를 섭렵하여 왕건에게 새로운 나라를 여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 후 도선의 제자 경보는 견훤의 배려로 전주의 남북선원에 주석하며 후백제의 정신적 후원자로 있었으나 견훤이 왕건에게 귀부한 뒤로는 왕건의 정치적 자문의 역할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선문9산은 고려라는 새로운 사회를 이루어내는 받침돌 역할을 하게 되었다.
왕건은 고려를 개국하면서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훈요10조(訓要十條)’를 남겼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분히 선문9산의 사상과 풍수지리 사상을 반드시 지킬 것을 못 박고 있다. 당시 선종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고 또 그것은 선종에 힘입어 새 왕조를 창업한 왕건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후 고려시대의 불교의 경향은 교종이 중심이 되어 선종을 포섭하려는 입장과, 선종을 중심으로 하되 교종을 통합하려는 경향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전자의 예로는 왕자 출신의 대각국사 의천의 ‘교관겸수론’이고, 후자의 입장은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쌍수론’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보각국사 일연의 선종의 확장과 태고 보우의 선교통합의 노력을 거쳐 고려 말 나옹 혜근까지 고려 불교를 대표하였고, 자초 무학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했으나 성리학의 그늘에 가려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명종 때의 문정왕후에 의한 일시적 불교중흥 정책에 의해 부활하였고 임진왜란의 혼란기를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한 서산대사 휴정과 그 제자 유정(사명당)이 불교의 명맥을 이어왔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조선총독부는 천황을 위해 헌신한 일본의 조동종 휘하로 조선불교를 예속시키려는 갖은 술책을 썼으나 한국선불교의 정신적 우위를 부르짖은 경허, 만공 등의 강경한 저항이 있었고, 만해 한용운의 불교유신론, 그리고 해방 전후의 봉암사 결사에 참여한 젊은 선승인 성철의 노력 등이 오늘날의 조계종의 뿌리를 확고히 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불교가 한국의 정신문화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으며 4세기 후반에 중국으로부터 외래종교인 불교를 들여오면서 삼국은 왕권강화 및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큰 기여를 하였다.
삼국시대의 중기까지는 의상의 화엄종 등 교종 중심의 교학 불교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그로부터 약 500년이 지난 시점에 달마의 선종이 한반도에 크게 세력을 떨쳤다. 선문구산은 신라 말에서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에 이르는 과정에 골품제라는 폐쇄적인 신분사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불교사상의 대변혁이라고 여겨진다.
즉 이때의 9산의 선문(禪門)들은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새로운 정신세계의 정립에 기여한 문화적 전승자들이라 할 것이다.
신라 말 당나라 유학승들이 선문9산을 개창한 이래 고려조에 들어와 특히 보조국사 지눌이 주석하였던 송광사가 승보사찰로서 16국사를 배출하면서 선암사를 제치고 선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고, 불교 종파로는 조계종이 한국선불교를 이끌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