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동 부국장
백범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고 했다. 그가 꿈꾼 ‘문화의 힘’은 단순히 예술적 성취를 넘어, 한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과 존엄을 지켜내는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그 힘은 국가의 자존심이자,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문화적 결속체였다.

그리고 오늘날, 그 간절한 바람은 놀랍게도 현실이 되었다. K팝, K드라마, K무비, K뷰티에 이어 이제는 K-애니메이션까지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이름을 빛내고 있다. 한국 문화가 글로벌 대중과 직접 소통하며, 그 영향력은 단기간에 엄청난 수준으로 확장되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는 이 흐름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K팝을 전면에 내세운 이 작품의 OST ‘골든(Golden)’은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에서 4주 1위를 기록하며, BTS ‘다이너마이트’가 세운 3주 연속 1위 기록을 넘어섰다. 뿐만 아니라 OST 4곡이 동시에 빌보드 톱10에 진입하는 진기록을 세워, 빌보드 64년 역사상 최초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케데헌’은 아동·청소년용 애니메이션을 넘어 전 세대를 아우르며 열광하게 만든 문화 현상이다. 한국적 스토리텔링과 세계적 감성을 담은 K팝, 디지털 세대가 공감할 만한 애니메이션이라는 시각 언어, 그리고 글로벌 유통 플랫폼이 결합된 융복합 문화 콘텐츠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K컬처의 힘이 어떻게 현실에서 거대한 파급력을 만들어 내는지 보여주는 산 증거다.

이렇듯 문화는 더 이상 예술의 주변부가 아니다. 그것은 도시와 국가의 경쟁력이며, 미래를 결정짓는 전략적 자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포항을 바라볼 때다. 포항은 오랫동안 철강과 과학기술로 대표되는 산업도시로 자리매김해왔다. 하지만 산업만으로 도시의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도시의 경쟁력은 더 넓고 깊은 차원에서 평가된다. 삶의 질, 감성, 시민 참여,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가 품은 이야기가 문화로 꽃피울 때, 도시 브랜드는 빛난다.

포항은 풍부한 이야기 자산을 지닌 도시다. 연오랑세오녀 신화와 하선대 전설은 오래된 토속 신앙과 전통 문화를 품고 있다. 제철 산업의 역사는 포항의 근대사를 상징하며, 동해 바다와 고래 이야기는 해양 문화의 깊이를 더한다. 여기에 해녀들의 삶과 그들이 지켜온 해양 생태계, 그리고 겨울철 포항을 대표하는 별미 과메기는 지역 고유의 문화 콘텐츠가 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 모든 요소는 현대적 감각과 창의적 해석을 통해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로 재탄생할 잠재력을 품고 있다. 하지만 문화는 단순한 이벤트나 축제에 그쳐서는 안 된다. 많은 지방 도시들이 축제나 행사를 문화 활성화의 답으로 삼지만, 반복되는 이벤트로는 시민의 정체성도, 참여도도, 더 나아가 지속 가능성도 확보하기 어렵다. 문화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지속하고, 누구와 연결하며, 무엇을 남기느냐’가 더 중요하다.

케데헌의 성공 비결도 바로 이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 K팝이라는 감성 자산에 애니메이션이라는 시각적 표현, 그리고 글로벌 플랫폼이라는 유통망이 결합해 문화상품을 넘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확장됐다. 포항도 이와 같은 문화 전략이 필요하다. 지역이 가진 산업과 자연, 역사 자산을 디지털 콘텐츠로 재해석해 세대 간 소통을 강화하고, 외부와 적극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과거를 단순히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 도시의 이미지를 새롭게 설계해야 할 때다.

문화는 도시를 기억하게 한다. BTS, 《오징어 게임》, 《기생충》, 그리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는 단순한 한류 스타나 콘텐츠를 넘어, 세계가 한국을 하나의 정서와 감성으로 각인하게 만든 기억의 축적이다. 포항도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지금은 철강 산업과 지진으로 기억되지만, 앞으로는 ‘스토리가 살아 숨 쉬는 도시’이자 ‘콘텐츠가 일상이 된 해양문화도시’로 다시 쓰일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포항은 '동백꽃 필 무렵'과 '갯마을 차차차' 같은 인기 드라마의 촬영지로 주목받으며, 이 지역만의 독특한 정서와 풍경이 문화 콘텐츠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특히 일본인 가옥 거리와 바닷가 풍광은 단순한 촬영 배경을 넘어, 지역 스토리텔링과 관광 자원으로서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품고 있다.

포항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2028년 완공 예정인 관광컨벤션센터와 포항시립박물관 등 대규모 문화 인프라가 조성되고 있다. 이 시설들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시민의 감성을 담아내고, 도시의 미래 비전을 보여주는 문화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 중심에는 치밀한 문화 전략과 철학이 반드시 자리해야 할 것이다.

문화는 감각이자 설계다. 단순한 감성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지속 가능한 전략과 만나야 사람을 모으고 도시를 움직일 수 있다. 케데헌이 미국 빌보드를 흔든 것은 단순히 K팝의 힘 때문이 아니라, 문화가 전략적으로 기획되고 도시와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포항도 이제 ‘기술과 산업의 도시’를 넘어 ‘문화가 중심인 도시’로 전환해야 한다. 산업이 도시를 세웠다면, 문화는 도시를 기억하게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바랐던 ‘높은 문화의 힘’은 이제 포항 시민과 리더십의 선택에 달려 있다. 포항의 새로운 미래는 ‘문화’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제는 포항의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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