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규 칼럼니스트

지구촌에 가장 많이 생존하는 생물체는 나무(木)이다.
또한 그에 버금 가는 생물체로 사람이 있다. 이 두 존재는 창조주의 피조물 중 가장 복을 많이 받은 존재들! 왜냐면 하나는 지구촌에서 가장 오랜 생명을 유지하며 살고 있고, 다른 하나는 가장 오래 살라고 천명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약 1000년이 넘는 느티나무 아래서 그 노거수(老巨樹)를 들여다 보며 감탄과 경이로움에 그 자태를 보면서 욕심(慾心)으로 채워진 간사(奸詐)한 인간의 기이한 삶을 생각해 본다.
나무를 한자로 써 보면 목(木)자로 쓴다. 가만히 보니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는 모습, 그래서 인지 성경에도 사람을 나무로 비유(比喩)를 해 놓은 곳을 여러 군데서 발견한다.
성경은 예수란 사람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놓았고 유다 사람을 나무로 비유하여 써 놓은 성경 글귀가 많다. 왜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였을까?
태초에 천신(天神)은 한 씨를 땅에 뿌리고 “너는 이 땅에 뿌리 박고 살라”는 천명(天命)을 주었다. 나무에게 사명(使命)을 준 것이다. 어떠한 외란(外亂)과 역경이 와도 차가운 비바람이 몰아쳐도 인내하고 끈기를 발휘하여 본연의 임무를 다 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이다. 해서 이 나무들은 자신의 사명을 다 하기 위해 하늘 높이 솟아올라 세상을 자기 밑에 두고 싶었으나 절제하여 120m 이상 높아지지 않았고, 교만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자 땅 밑에 수 천개의 뿌리를 뻗어 거대한 폭풍과 위력적인 바람에도 끄떡 없이 자신을 지켜왔던 것이다.
행여 무자비한 인간이 도끼를 들어 자신을 내려 치고 자신의 손과 발을 톱으로 짤라도 그들은 말없이 고통과 아픔을 참고 조용히 내면에서 나오는 수액으로 상처(傷處)를 아물도록 스스로 치유(治癒)했다.
무더운 여름에는 어김없이 그늘을 만들어 사람과 동식물들의 안식처를 만들었고, 폭풍과 칼 바람이 몰아치는 엄동설한(嚴冬雪寒)에는 미천한 인간의 추위를 덮어주는 장작개비가 되어 자신을 불태우는 살신성목(殺身成木)의 길을 군말 없이 걸어갔다. 그리고 지구촌 전체를 덮어 재해를 방지하고 인간에게 자비(慈悲)와 자애(慈愛)를 통해 풍요로운 삶의 한 귀퉁이를 부여잡고 그리고 말없이 천년(千年)을 한 자리에서 버티며 천명(天命)을 받들어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인간에게 나무를 빗대어 천신(天神)은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태초에 신은 인간에게 그 어떤 만물에게도 주지 않았던 천명을 주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태초의 천수는 영원한 삶인 영생이었음을 기록한다. 말 잘 들으면,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는 치리권을 주신 것이다. 이 치리권을 통해 생육 번성 충만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엄명(嚴命)이었다. 물론 결과론 적으로 나무에게도 준 같은 사명이었다.
허나 인간에게는 마음속에 화근(禍根)이 있었으니 바로 욕심(慾心)! 욕심이 잉태(孕胎)하여 죄(罪)를 낳았고 그 죄가 장성하여 사망(死亡)을 가져 온다.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던 인간은 마음에 욕심이 화근이 되어 죄(罪)라는 거대한 자기 성(城)을 쌓았고, 그리고 그 죄를 이기지 못하여 오늘날 120년의 천수(天壽)를 받아 그 죄의 성안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감내(堪耐)하고 최후에 후회(後悔)와 회한(悔恨)을 통해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욕심(慾心)은 무엇인가? 하늘에 천명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핑계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극단의 이기와 돈벌이다. 세상살이 하는 인간을 움직이는 것이 욕심(돈)이다. 그 돈의 욕심을 버리는 자에게 진정한 장수(長壽)의 복(福)이 함께한다고 했음이다.
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했겠는가?” 바로 오늘날의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신의 예언이 아니었던가? 끊어진 창조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종교(宗敎)라면, 욕심의 칼이 인간과 창조주의 생명의 탯줄을 자르고 그 욕심으로 만인과 만물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로 내려 놓으라는 것이다. 현실을 보자! 세상살이 모든 죄의 원흉이 돈과 연계되지 아니한 사건들이 어디 한 개라도 있던가?. 하늘을 빌미로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있는 자들에게는 욕심을 양심(良心)으로 바꾸는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특히나 정신혁명을 선도해가야 할 종교지도자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영육간에 가난(家難)과 심란(心亂)에서 오는 정신병을 얻은 이들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옛 말에 “등 따시고 배부르면 딴 생각이 든다”는 말 속에는 더 깊은 뜻이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여유를 가진 자들이기에 가난한 자들의 마음을 보듬으라는 말이다. 종교란 그런 것이 아닐까? 등 따시고 배부른 종교 지도자들이 더욱더 가난한 자에게 자비와 자애와 사랑을 통해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
약1000년을 넘어 살고 있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사람도 이제는 천수(天壽)를 살아가는 나무 같은 수명을 가진 인간들이 이 아름다운 지구촌을 수 놓을 날이 와야 한다. 인간이 나무 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창세로부터 자연 만물 속에 하늘에 뜻(理致)를 넣어 놓은 이유가 있음이다. 이들의 삶에 들어있는 이치(理致)를 보고 배워 행하라는 뜻이 노거수의 삶을 통해 나타나 있음이 아니겠는가?
욕망과 탐욕으로 꽉 차있어 작은 일에도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인간 모두에게 보내는 하늘에 경고이며, 천벌을 기약하는 심판의 서막이 되기도 한 것이다.
저 천명을 감당하고 있는 나무를 보라고 말이다. 천년을 넘어 살아가는 노거수들의 땅밑에는 온기(溫氣)와 양기(陽氣)로 사랑이 가득한 천수(天水)가 흐르는 명당(明堂)이 자리하고 있으니 바로 사랑이란 에너지가 가득한 곳이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사람이라 비유하는데 그 뜻이 바로 천지인(天地人)의 삶 즉 “잘 살아가란” 천명이기 때문이다. 하늘을 이길 수는 없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