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호 한국전력 대구본부장

▲ 황상호 한국전력 대구본부장.

경주는 우리 역사의 숨결이 곳곳에 배어 있는 도시다. 신라의 천년이 남긴 석조와 탑, 고도(古都)의 길 위에서 수많은 시간이 조용히 흐르고 있다. 그런 경주가 최근 세계의 무대가 되었다. APEC 정상들이 모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도시는 과거와 현재, 지역과 세계가 만나는 상징적 장이 되었다. 그 장을 지탱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전력’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역사는 겉으로 보이는 유물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제도와 인프라에 의해 이어져 왔다. 신라의 토목과 수리기술이 백성을 먹여 살렸듯, 오늘날의 도시와 국제회의를 지탱하는 것도 전력 인프라다. 불국사의 등불이 사람들을 모았던 것처럼, APEC의 조명과 통신을 가능하게 한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었다.

한국전력은 지난해 8월 ‘APEC 전력확보 추진위원단’을 꾸렸다. 경주는 곳곳에 문화재 보호구역이 자리하고 있어 전력설비를 새로 설치하거나 굴착 공사를 하기가 쉽지 않다. 빠른 계획수립과 정교한 실행이 필요했다. 추진위원단은 안전·대외협력·계통보강·배전·송변전 등 5개 분과로 나뉘어 무정전·무사고·무결점 전력공급을 목표로 삼고 하나씩 숙제들을 풀어갔다.

약 100억원 규모의 전력망 확충 공사로 3개의 배전선로를 새로 인출해 공급능력 3만kW를 추가했고, 선로 간 연계력을 높였다. 드론과 광학카메라로 접근이 어려운 설비를 점검하고, VLF·부분방전 진단으로 내부의 미세한 이상 신호까지 선제적으로 잡아냈다. 송전선로와 변전소, 배전설비, 고객 설비를 포함해 1만5000개소를 사전진단한 일은 겉으론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 무대가 켜졌을 때 모든 불안 요소를 제거하는 핵심이었다.

APEC을 치르는 동안 옛 공사의 기록을 떠올렸다. 신라의 석축을 쌓은 장인들이 지형과 재료를 읽어내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듯, 오늘의 전력기술자들도 현장의 미세한 조건을 읽어내며 전류 한 줄까지 책임진다. 과거의 장인정신과 오늘의 기술적 숙련은 시대는 달라도 본질에서 통한다.

한국전력의 주요 행사장에 구축된 4중 전원 체계와 24시간 종합상황실, 6천여 명의 현장 인력과 특별기동대의 순시 활동은 단순한 안전활동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신뢰의 그물망’이다. 주전원·예비전원·UPS·비상발전기로 이어지는 다층 보호망은 국가행사에 한순간의 사고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결의이자 국민과의 약속이다. 그 와중에 세 차례의 비상대응 모의훈련을 통해 실전 대응력을 다졌다.

한국전력은 경상북도와 경주시, 한국전기안전공사 등과 손을 잡고 ‘협업의 축’을 만들었고,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홍보·사회공헌 활동으로 성공개최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했다. 역사적 공간에서 진행되는 행사는 지역 주민과의 신뢰 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한전은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넘어, 국민기업으로서의 신뢰를 지키고자 했다.

전기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멈추면 모든 것이 멈춘다. 전력망은 현대사회가 작동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토대다. 그리고 그 토대는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역할을 다하는 사람들의 손끝에서 완성된다.

그 옛날 사람들도 공동체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보이지 않는 일을 해왔을 것이다. 오늘 한국전력은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전기는, 결국 사람의 신뢰와 책임에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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