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문 한동대 교수

 필자의 선친께서 살아계신다면 105세가 되시나, 13년전 92세에 작고하셨다. 하지만 올해 만 100세 되신 어머니는 생존해 계신다. 항상 어머니가 걱정되지만, 70대 중반의 형님 부부가 잘 모시고 계셔서 안심이 된다. 부모님은 7남매를 두셨는데, 모두 결혼해서 대개 2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들 손자손녀들은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에 이르도록 미혼인 경우가 많고 결혼을 했어도 자식은 한두명 뿐이다. 이는 부모님의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이다. 구한말인 19세기까지는 많이 낳아도 유아사망률이 높아 대를 잇기 힘들었는데, 20세기 들어서는 많이 낳고 많이 살아남아 인구가 크게 늘었으나, 21세기 들어서는 결혼도 늦고 아기를 낳지 않으니 초등학교들이 폐쇄되고, 대학도 신입생모집이 힘들어졌다. 이러다가는 21세기 중반쯤이면 우리나라 인구가 크게 줄고 고령화되어 국가경제도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다.

1960년대 시작된 연속적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인 실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를 살리게 된 것은 미국의 요청에 의한 우리 국군의 월남파병이었다. 정부에서도 심사숙고 끝에 파병을 결정했고 1964년부터 차례로 몇 개 전투사단/여단 5만명이 파월되어 1973년까지 연인원 325,500명이 파병되었다. 한국군은 미군과 같은 봉급을 받았지만 90%는 정부가 가져가 국가경제개발에 활용했다. 물론 그때 받은 10%도 당시 국군 봉급의 10배였다. 우리 국군은 무기도 한동안은 6.25때 쓰던 낡은 M1게런드/칼빈소총, 60/81mm 박격포 등으로 무장했지만, 다른 우방국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한국군도 장비 현대화를 기할 수 있었고, 많은 한국기업들이 월남에 진출하여 돈을 벌어들였다. 이 월남전 특수가 한국경제를 한 단계 올리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처음에는 지원자들이 갔지만 나중에는 부대 자체가 파견되었는데, 우리 친척들 중에도 월남전 참전자가 여럿 있다.

필자는 성격·습관도 학업성적도 고만고만했던 7명 형제자매 중 하나로 태어나 좋은 대학에 입학했고, 군생활을 총도 잘 쏘고 지휘관도 잘 모시며 병장으로 제대했다. 또한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마치게 되었으며, 전공을 살려 LA시정부에서 도시계획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 우리 한국은 88올림픽을 잘 마치며 눈부신 경제산업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당시 LA폭동도 있었지만, 매년 캘리포니아의 산불이 매우 심각해서 어떤 때는 LA 교외의 우리 동네 인근까지 불에 타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는 걱정이 태산이셨으며, 둘째 아들의 빠른 귀국을 원하고 계셨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오게 된 곳이 포항에 신설된 한동대였다. 그래서 1995년 8월에 식구들과 귀국하고 9월 1일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한국을 떠난지 14년만이었고, 혼자 떠난 필자가 아들 둘을 둔 네 식구의 가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필자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우리 형제들은 모두 결혼하여 가정을 두었고, 다들 서울에서 안정된 직장에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필자만 경북 포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신설대학이지만 혁신적인 프로그램과 함께 출발한 한동대는 우수한 교수와 학생들을 유치하고 국내외에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이 컸었다. 더구나 1999년에는 한국이 IMF 상황이 되면서 경제가 더욱 힘들어지고 있었다. 우리 식구는 용흥동에 전세 살면서 아이들을 근처 초등학교에 보냈는데, 미국학교에 다니다 왔으니 한국어도 서툴지만 문화적으로도 어려움이 컸었다. 우선 전학수속을 하는데 교육청 직원들이 미국에서 재학 증명서 등을 모두 가져왔음에도 어떻게 믿느냐는 등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급하게 제출하라는 과제/공작물들이 많았는데, 그 때문인지 몰라도 이를 부모님들이 해주는 경우가 흔했기에 우리 애들은 경쟁에 힘들어했다. ‘난 잘못이 없는데 선생님이 왜 머리를 막대기로 때려?’하며 의아해하기도 했다. 어떤 선생님은 말을 좀 서툴게 한다고 ‘누가 미국에서 살다 오래?’ 하면서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재미교포 1.5세인 필자의 처도 어려움이 컸지만, 다행히 애들은 나름 잘 성장해갔고, 필자도 전공을 살려 포항지역의 도시환경문제, 경제산업개발, 환동해권 활성화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했고, 또한 지자체 회의에도 참석하곤 했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2000년대 들어 IMF를 벗어났고 경제산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항지역은 호황 가운데서도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는 중국 철강산업 약진으로 인한 포스코의 경쟁력 약화 때문이었다. 포항은 산업다양화를 위해 영일만항 활성화, 해양관광도시로 발전, 그리고 2차전지, 수소클러스터, AI 데이터센터 등 유치로 초첨단산업도시로 변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이를 뒷받침할 국제적인 경쟁력을 지닌 ‘연구 및 대학원 중심 포스텍’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지닌 ‘강한 학석사 중심 한동대’가 이 지역에 존재하며 지역을 브랜드하고 있다. 1995~2000년쯤 이미 70대 중후반이시던 부모님께서 포항을 몇 차례 방문하셨는데, 서울역에서 새마을호를 타면 5시간 30분 걸리는 먼 길이었다. 그 당시 하루 2차례 비행기가 김포-포항을 왕복했지만, 활주로가 짧아 결항이 잦았고, 부모님은 안전한 기차여행을 선호하셨다. 그후 KTX가 포항에 연결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지금은 포항에서 KTX를 타면 2.5시간 내에 서울역에 도착하게 된다. 선친께서는 산불로 벌거숭이 되고 이암토질에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하는 주변의 산야를 보시며 ‘LA와 비슷해 보인다’ 하셨고, 캠퍼스 내에 줄지어 심어진 벚나무들을 보시며, ‘벚꽃은 일본 국화가 아니냐, 느티나무 등 다른 튼튼한 것들을 심어야 더 아름답지 않았겠느냐’는 의견도 피력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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