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들 영화관·복도·버스에서 박스 덮고 쪽잠
직장협 “준비 부족 탁상행정…사과·재발방지 필요”
경찰청 “공간 확보에 한계…초기 혼선은 즉시 개선”
김민석 총리 “현장 실태 파악해 대책 마련하라” 지시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지난 1일 막을 내렸지만, 현장에 투입됐던 경찰관들 사이에선 열악한 대기 공간과 부실한 급식, 숙소 환경을 둘러싼 불만이 이어지고 있다.

전국경찰직장협의회(직협)는 10일부터 경찰관들이 영화관 스크린 앞이나 복도, 버스 안에서 박스나 담요를 깔고 쪽잠을 자는 모습, 바닥에 도시락을 두고 식사하는 장면 등을 담은 사진을 공개했다.

이들은 "대기 시간에 따뜻한 공간이나 침구도 없이 노숙에 가까운 환경을 감내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APEC에 동원된 한 경찰관이 박스를 덮고 쪽잠을 취하고 있다. 전국경찰직장협의회 제공
APEC에 동원된 한 경찰관이 박스를 덮고 쪽잠을 취하고 있다. 전국경찰직장협의회 제공

일부 경찰관은 "모포가 지급된 곳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곳도 있어 폐지를 주워 덮었다"고 증언했고, 한 모텔에선 화장실 문이 없어 “룸메이트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환경”이라고 토로했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는 "찬 도시락이나 유통기한 임박 샌드위치를 받았다", "숙소는 멀고 대기 시간엔 버스 안에서 기다려야 했다"는 글들이 올라왔다.

11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는 '경찰을 노숙자로 만든 APEC' 사진전이 열렸고, 12일부터는 국회 앞으로 자리를 옮겨 이어진다.

직협은 “1년 가까이 준비한 행사에서 경찰청과 경북경찰청, APEC기획단이 현장 여건을 무시하고 탁상행정으로 일관했다”며 지휘부에 대한 직무 감사와 전수조사, 사과와 수당 지급,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했다.

APEC에 동원된 경찰관들이 영화관에서 대기하고 있다. 전국경찰직장협의회 제공
APEC에 동원된 경찰관들이 영화관에서 대기하고 있다. 전국경찰직장협의회 제공
경찰관들이 영화관 복도에서 잠을 자고 있다. 전국경찰직장협의회 제공
경찰관들이 영화관 복도에서 잠을 자고 있다. 전국경찰직장협의회 제공

논란이 확산되자 경찰청은 “충분한 휴식과 양질의 식사를 제공하지 못한 점에 미안하다”고 밝히면서도 대기 공간 운영엔 제약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경찰에 따르면 APEC 기간 하루 최대 1만9000명이 투입됐고, 이 중 4500여 명은 경주화백컨벤션센터와 정상 숙소 경호에, 나머지는 경비·교통 관리에 동원됐다.

경찰청은 영화관·리조트 등을 임차해 약 2300명을 수용할 실내 대기 공간을 확보했고, 나머지 3200명은 버스 160대를 활용해 대기토록 했다고 설명했다.

영화관 복도 취침 사진에 대해선 "버스 대기가 불편하다고 느낀 일부 인원이 지급된 담요나 박스를 활용해 자율적으로 쉰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 담요 1만566개, 간이침대 536개를 보급했다고 덧붙였다.

급식에 대해서는 “최대 7000식을 200여 현장에 배달하고, 4000식 이상 단체급식을 제공했다”며 “초기 혼선은 급식지원팀 증원으로 개선했다”고 밝혔다. 10월 28일 도시락이 차갑거나 야외에서 취식된 사례는 “일정 변경 때문이며, 다음날부터는 단체급식소를 정상 운영했다”고 설명했다.

노후 숙소에 대해선 “사진 속 모텔은 정상 입국 일정 변경으로 급히 확보한 곳”이라며 “대부분은 사전 점검을 거쳤으나 1인 1실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11일 경찰청에 진상 파악과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그는 “당초 경찰청은 문제없다고 보고했지만, 실제로는 일부 경찰관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했다”며 “현장 경찰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사실관계를 정확히 보고하고 합리적 대책을 수립하라”고 말했다.

아울러 검찰개혁과 함께 경찰도 수사역량을 강화하고, 국민 안전을 촘촘히 보호할 수 있도록 종합적인 경찰 개혁방안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행정안전부와 경찰청에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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