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규 부국장(상주담당)

24절기 가운데 스무 번째 절기인 소설(小雪)은 ‘작은 눈이 내린다’는 뜻을 지닌다. 양력으로 11월 22일 무렵, 바람이 한결 매서워지고 땅이 얼기 시작한다. 아침이면 물기가 얇게 얼어붙고, 들판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앉는다. 아직은 눈이 드물지만, 찬 기운 속에서 겨울의 문턱을 넘는 순간이다.

농가에서는 이 시기를 보리 파종의 마지막 시기로 여긴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텅 빈 논밭에 다시 씨앗을 뿌리며 한 해의 마지막 일을 마무리한다. 보리는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하는 작물이기에, 소설 무렵에 뿌리를 단단히 내려야 한다. 땅속에서 잎보다 뿌리가 먼저 자라나야 혹한을 버티고, 다음 해 봄에 싹을 틔울 수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소설 전에 보리를 뿌려야 풍년이 든다”는 말이 전해졌다.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 “눈은 보리의 이불이다”라는 속담도 이런 농심을 잘 드러낸다. 추위는 보리를 강하게 만들고, 눈은 그 위를 덮어 따뜻한 이불이 되어준다. 하늘의 눈발 하나, 땅의 찬기운 하나에도 농부의 마음은 늘 촉각을 세웠다. 절기의 변화 속에는 오랜 세월 쌓인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지혜가 깃들어 있다.

하지만 보리가 땅속에서 자라나는 동안, 사람들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겨울이 깊어가고 봄이 다가오면, 지난해의 곡식은 바닥나고 새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았다. 이 시기를 사람들은 ‘보리고개’라 불렀다.

그 이름 속에는 단순한 궁핍을 넘어, 배고픔을 견디는 인내와 생명에 대한 절실한 믿음이 담겨 있다. 농부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며, 땅속에서 잠든 보리가 무사히 살아남기를 빌었다. 보리의 싹이 다시 고개를 들 때까지, 사람과 자연은 함께 겨울을 견뎌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보리고개를 겪지 않는다. 냉장고 속엔 사계절 내내 음식이 있고, 계절의 경계도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나 ‘견디고 기다린 끝에 얻는 결실’이라는 삶의 이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빠른 변화와 풍요 속에서도, 자연의 리듬에 귀 기울이고 제 때를 기다릴 줄 아는 태도는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다.

소설은 단지 눈이 내리는 시점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보리의 뿌리가 얼음 밑에서 자라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는 변화가 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어려움도 어쩌면 그와 같을지 모른다.

눈앞의 추위와 침묵을 견디며, 보이지 않는 성장을 이어가는 시기. 특히 상주는 내륙지대라 봄철 가뭄이 잦아 이 시기에 유난히 어려움을 겪었고, 그래서 상주에서는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는 말이 생겼다. 지난 계절의 곡식이 바닥나고, 새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그 고비를 묵묵히 견뎌낸 농심 속엔 기다림의 믿음이 있었다.

소설​(小雪)의 작은 눈발처럼, 세상은 느리지만 분명히 변한다.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봄을 믿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상주의 들녘이 전해주는 인내의 지혜이자, 현대의‘보리고개’를 건너는 또 다른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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